좀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내 생애 첫 팬레터였다
....
000신문사 들어가서 수습기간 빼고 한 두어달 일했나..
어느날
백기완 선생 끼인 어느 회합에 가서 사진 찍고 나오는 데
강당 안팎분위기가 전혀 달라서
이거 나가서 어디로 끌려가 맞아죽든지
안에서 깔려죽든지 겠구나... 하는 위기감이 나를 위축되게 만들었다
.. 그때, 난 정치기사는 못쓰겠구나, 했다
수도권 어디에서 하는
모종교단체의 대회를 소식듣고 취재하러 쫓아간적이 있었는데
대형버스 수십대가 들어왔다
어디 근처에서 마을사람들 몽땅 쓸어담아와 내려놓는 게 아닐까,
여겨질 정도였다
종교단체에서 하는 대회는 대체 어떤 것일까,를 궁금해하며,
대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 설교자이며 대회 주도자인 000 목사님을 찍어야쥐 싶어서
다가가는데,
어마나,
목사님 보디가드가 너무나 잘생긴 거였다
떡 벌어진 어깨에
무시무시 번뜩이는 눈이 또 얼마나 이쁘게 생겼던지..
입술은 꾹 다물고.
내가 확. 끌리는 외적요소는 일단 다 가진 남자였다
시골사람들 모아놓은 것 같은(대형버스에서 막 쏟아낸) 좌중을 경계?하며
다른 여러 보디가드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는 - 내 지척에 - 있었다
도대체 목사님이 보디가드가 왜 필요한지,정도도 궁금해하지 않고, 나는
목사님 찍으면서 암튼 그 보디가드가 엇비껴서라도 나오게 사진을 찍어대고
목사님 설교니까 별거 아니겠지 뭐,
맨날 교회에서 듣는 그거겠지 뭐,
그러면서 목사님 설교는 듣는둥 마는둥 (아니, 전혀 귀에 안들어왔다)..그랬다
나중에 현상해서 목사님 사진은 갖다버리고
그 잘쌩긴 보디가드 얼굴을 증명사진크기(3*4)로 만들어서
한동안 지갑에 넣고 다녔다
내가 이연걸한테도 이렇게 안해봤는데...
당시 초등학생이던 남동생이 어느날 그 사진을 보고 물었다
- 누나 애인이야?
- 아니, 000목사님 보디가드야
- 아는 사람이야?
- 아니... (알았으면 좋겠다, 뭐 그거지...쩝)
녀석은 고개를 내저었다..
... 그래서 난, 문화부기사도 못쓰겠구나, 했다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기사를 소설처럼 쓴다는 쿠사리를 내리 맞고
결국 그만두었다
이래서 '뽄대나는' 사회생활을 접고,
...
다시 이야기 처음으로 돌아와서,
그리고나서 참 여러가지 '글쟁이'짓을 하구 살았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나를 '글쟁이잣대'로 본다면
배 곯기 딱 좋은 수준인지라,
그처럼 진지한 팬레터는 당시 나를 무척 감동시켰다
발신인의 주소가 모부대였던 것으로 보아
군인인것같았다
첨엔 내용이 사적으로 접근하더니
내가 자네보다 한참 위야, 해버리니까
누님, 선생님, 누나, 뭐 이런식으로 한동안 계속 편지를 보내왔다
그는 내 글을 읽고 군복무기간을 위로받았을테지만,
나는 그의 편지를 받고 에너지를 충전했다
그리고 몇분의 편지가 기억에 남는데, 팬레터가 아니라
조언과 독려의 내용이었다
소설가이며 교수인 000님 - 상징어에 의미함축을 담는 재능이 눈에 띄니
계속 시창작에 정진하라고 편지를 주셨다.
나는 그분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그래서 더 감격했었다
연출가 000님 - 함축성 있는 대사가 깔끔하고 인상적이다.
하지만 귀하의 작품에 등장하는 몇몇 장면들은 단막극에서 소화하기에
스케일이 커서 무리가 있다, 고쳐서 다시 보내줄 수 있느냐..
... 다시 보내지 않은 것으로 기억한다, 난 대책없이 고집만 세었다
그장면을 빼고 다른 것을 넣으면 도대체 스토리가 진전되지 않을것만 같았다
피난열차에서 떨어지는 형제를 회상하는 장면이었다.. 이걸 뭘루 바꾸란말야..
모교의 교수이셨던 000님 - 니 시집을 읽고 연락한다
내 제자 중에 아직까지 글쟁이로 남아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열심히 해라
..
내가 진지하게 이제 그만
'글쟁이세상'에서 내려올까 망설이던 시절이었다..
돌아다니고(여행)
글을 쓰는 것을 워낙 좋아하기에
나는 지금도 낮일(여행사)과 새벽일(글쓰기)을 병행하고 있다
아련한 그 어느날의 기억 속에 나를 담고 계실
편지의 주인공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카이로에서] 2007년6월14일 편지의 힘은 위대하다, 그 긴날을 ..나를 잡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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