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안이나 건물 안이 아니면 사람구경하기 힘든 시간이다. 카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대로 차를 두고 공중전화 있는 데까지 가는 것도 위험천만한 일이다. 외국인의 것은 잘하면 내것, 선교사의 것은 온전히 내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가 아무리 선교사역을 하러 왔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손 잘타는 나라에서 마음 속에 자비와 사랑을 유지하기란 쉽지가 않다. 이대로 차 궁둥이를 밀고 수리센터나 전화 있는 곳까지 가볼까 카폰있는 차를 골라 세워 부탁을 해볼까 생각이 많아졌다. 근래에 들어 부쩍 카폰인지 핸드폰인지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갖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고 형편이 안되는 어떤 현지인들은 고장난 무선전화기를 손에 척 들고서 으시대며 거리를 활보한다. 우선 아무차나 세워서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오른 손 엄지 손가락을 위로 향하게 하고 팔을 쭉 폈다. 대학 때 해본 히치하이크의 경험을 살려보려는 중이다. 아니나다를까 그가 팔을 쳐들자마자 달리는 차들의 반응이 대단해졌다. 어떤 차는 그의 망치같은 주먹이 자기차를 내리치려는 줄 알고 기겁해서 꽁무니를 뺐고, 또 어떤 차는 저 빵봉지만한 빨간 차도 저 거인이 타서 저지경이 됐을거야 하면서 지레 줄행랑을 놓았다. 아무도 그 망치 위에 볼록 솟은 앙증맞은 엄지손가락은 보지 못했다. 갑자기 차들이 속력을 내자 그 무더위에도 찬바람이 쌩쌩 불기 시작한다.
그런 상태로 삼 분쯤 있자니 몸뚱아리가 땀 짜내는 기계처럼 느껴졌다.
인간의 자력으로 될 수 있는 일의 한계가 뼈저리게 느껴졌다. 강의시간까지는 아직 십 오 분이 남아있었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려주었으면 할만큼 바짝 애가 탔다.
"이봐요, 뭐가 문제죠?"
가브리엘이 돌아보았을 때 그의 곁에는 어느 새 81년형 피아트가 멈춰있었다. 상큼한 단발머리의 키큰 동양여성이다. 그가 뭐라고 입도 열기 전에 눈치빠른 그녀는 성큼성큼 차에서 나와 '구겨진 빵봉지'의 본넷을 열어젖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