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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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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의 햇살 한 줌


BY 리니 2004-07-12

 

백화점 안에서 만나기로 한 것은
누구나 쉽게 찾은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고
한 여름에 잠깐이라도 냉방이 잘된 곳에서 기다리는 것이 좋을듯 해서겠지요.
집에서 가까운 백화점의 세일기간조차 모르고 지나갈 만큼
백화점을 잘 가지 않는데 오늘 압구정동 현대백화점엘 왔습니다.

약속 시간 10분쯤 전에 도착했습니다.
아직 정오도 되지 않은 시간이지만 오가는 사람들이 제법 많더군요.
가만히 서있는 것 보다는 10분 동안 이리저리 빠르게 돌면서 구경을 했습니다.

계단참에는 초점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어딘가를 향하고 있는 여자들이 앉아있습니다.
곳곳의 의자에 무슨 이유로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건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천천히 매장안을 거니는 사람들의 풍경이 물결처럼 흔들리구요.

사람들이 와글와글한 지하매장 한 켠에는
아주 멋스러운 그릇들을 특별판매 하나봅니다.
이것저것 집어들어 보다가 그만 내려놓고 약속장소로 다시 올라왔습니다.

에스컬레이트 앞에 서서 참으로 기이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주 우아한 자태의 여자들이
고급한 옷을 입고 느릿한 움직임으로 거닐며
에스컬레이트의 이동에 몸을 맡기는 모습이 마치 꿈결처럼 눈에 들어왔습니다.

슬로우 모션으로 출렁이며 내 눈에 들어온 그녀들의 모습은
'시간 죽이기'와 '시간 활용하기'의 의미를 분간하기에
순간 어지럼증을 일으켰습니다.

망연한 시선으로 백화점 에스컬레이트에 몸을 싣고
고가의 물품이 들어있는 쇼핑백을 든 팔에 걸린 것이
그들의 우월한 존재감일지 생존의미일지
그걸 눈꼽만치라도 생각이란 걸 하는 건지를
내가 왜 궁금해 하는지 괜시리 짜증이 났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 만나야 할 사람들 일부와
점심먹을 장소로 몇걸음 옮겼습니다.
결혼시킨 딸을 신혼여행 보낸 시누이는
인생의 계획이 순서대로 잘 진행되고 있음을 나름대로 흡족해 하면서
그 기분으로 축하를 보내준 친지들에게 즐거이 점심을 한 턱 냅니다.
기왕이면 식후 좀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려고
물색했다면서 정한 장소가 샐러드 바였습니다.

이미 내부의 전 좌석이 예약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예약된 자리에 앉아서 가까운 친지들의 정담을 들으며,
그 분들의 삶의 값진 이야기를 들으며,
또 배꼽빠지는 이야기를 들으며 상큼한 점심식사를 술술 소화시켰습니다.

요즘 흔히들 그렇겠지만 이곳에도 역시
우리 옆자리에 앉은 두 명의 외국인 남자를 제외하면
그야말로 여자들 천국이었습니다. 한낮은 아줌마들  세상인듯 싶었습니다.

그녀들의 허공에 흩어지는 웃음과, 시름을 내려놓는 이야기들로 가득한
그 곳의 분위기에 젖어있다가 나온 압구정의 오후는
한 여름 햇살만이 속절없이 제 할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상하게도 현.기.증.이었습니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도, 버스 안에서도, 과일가게에서도
오늘따라 그녀들만을 유난히 눈여겨 보는 나자신을 봅니다.
훗날 내 영혼을 앓던 날들이 언제였나 생각하던 적에
오늘도 한 페이지쯤 끼어들 것만 같습니다.

그냥 편하게 편하게 바라보고 받아들이며 살다보면
언제고 편안해지고 또 시들해지고 가끔은 기쁨이 솟구치기도 하겠지요.

이 모든 것들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길 바라면서요....

 

흩어지는웃음소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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