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편 - 꿈꾸는 라면.. |
< 지겨워..지겨워.. 매일같이 두드려 부술 살림이 있다는게 용하지 뭐야? 저러구 살걸 왜 헤어지지 않구 있나 몰라. 진짜 이상한 사람들이라니까.!!>
오늘도 통화내용은 여전히 나의 이웃,그러니까 아래층에 사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부 이야기로 매듭을 지어간다. 매일 살림을 던지면서 싸우다시피하는 알 수 없는 부부... 남편,마누라, 자식...다 가지고도 뭐가 모라자서 하루가 멀다하고 싸울까..
나는 수화기를 오른쪽 손에서 왼쪽 손으로 옮겨 잡으며 오른쪽 손목을 가볍게 돌렸다.
손목이 뻐근했다.
<응..그래.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하구.. 호호, 지지배 맛있는건 니가 사야지, 맨날 내가 사 냐? 그래 그래 알았어. 낼 보자. 응 안녕!>
전화기의 종료 단추를 누름과 동시에 나는 휴대폰을 침대위로 던져 버렸다.
" 웃기는 것들..." 나즈막히 그러나 뱃속 깊숙히 한마디를 내뱉으니 좀 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직도 귀 언저리가 저릿저릿한거 같다. 대학동기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내가 끊으면서 하는 말은 언제나 같다. 웃기는 것들... 배고픈 거지 앞에서 반찬타령하는 게 낙인 것들...
서둘러 컴퓨터 앞에 앉는다. 스케줄을 쓰윽 한번 훑어 본다. 저녁 6시에 잡지사 인터뷰가 있다.
내가 질색하는 것중의 하나가 유명인의 인터뷰다. 소위 유명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목이 뻣뻣하다는 것과 제 잘난 맛에 사느라고 주위를 돌아볼 여유같은게 없다는 것,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런 덜 된 인간일 수록 가질건 다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다는걸... 나는 얼마전에 깨달았다.
불공평한 세상이라지만 아무리 그게 자연스럽게 허락된 자본주의라지만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만날 나 모씨라는 요리연구가 만해도 그렇다. 이쁘장한 얼굴에 흠잡을 데 없는 몸매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끊일듯 끊일듯 사람 애를 녹이는 듯한 그 웃음소리... 남자들뿐만아니라 대개의 여자들도 그녀에게 호감을 느낀다.
그것뿐인가. 그녀 나이 이제 서른셋인데, 요리연구가라는 그럴듯한 명함에다, 그녀가 원장으로 있는 요리학원은 강남요지에 자리잡고 있고 곧 강북 신촌에 분원을 낼거라 한다.
그녀의 아이들은 어떤가. 아들하나 딸하나, 마치 동화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옷차림을 하고서 천진난만하게 웃는 여섯살 다섯살의 남매를 보면 아무리 나같이 꼬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입가에 미소를 짓게 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그녀가 가진것중 가장 핵심은 번듯하니 잘 생긴 그녀의 남편이다.
골프샾을 운영하는 그녀의 남편은 매너 좋기로 소문이 날대로 난 그야말로 모든여자들이 꿈꾸는 그런 부류의 남자다. 한때 그런 남자들은 뭔가 구린 구석이 있을거라고 색안경을 일단 끼고 의심부터 하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기대에 어긋난 적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남자... 나모씨의 남편은 소문조차 너무나 깨끗했다. 술주정꾼이라는 정보도, 여자를 밝힌다는 흔한 루머도 없다. 웃기는 것들...
그래 정말 웃기는 것들이지 뭐야. 지들은 다 가지고 있다 이거지. 세상 참... 드러워서.
오전 내내 자료를 정리하느라 어깨가 묵직할 지경으로 컴퓨터 자판을 두들겨대고 두시가 지나서야 찬밥에 고추장을 넣고 참기름 조금 넣고서 양푼째 끌어안고 밥을 먹는다. 나름대로 맛있다.
하하... 오늘 요리연구가 만나러 가는데 나는 세상에서 가장 원초적인 점심을 먹었단 말이지..
길이 막힐것을 예상해서 나는 지하철을 탄다. 아직 차를 장만할 형편도 못되지만 이 도시에서 차를 몬다는건 내 신용을 위태롭게 하는 도전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프리랜서인만큼 신용이 가장 최우선이어야 하니까..
일을 때려치운다고 먹여살려줄 남편이 있는것도 아니요, 토끼같은 자식이 있는것도 아닌 나처럼 가진것 없는 사람은 스스로가 가장 큰 재산인 법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미리부터 와서 온 스탭들에게 음료를 대접하고 간단한 요기거리를 직접 만들어 와서 펼쳐놓고 있다.
웃기는 것들... 스탭들은 좋아라고 웃으며 칭찬을 한마디씩 늘어놓고서 그 댓가로 빵을 한조각 들고 음료를 한잔 얻어 마신다.
음... 맛이 있긴 있다. 요리 연구가니 오죽 잘할까.. 이런거 하는 것쯤은 일도 아닐텐데 뭐 저렇게 호들갑스럽게 칭찬이람..
인터뷰는 평범하다. 그래서 지루하다. 이런 잡지를 사보는 사람이 불쌍하다. 이렇게 재미없는 말 놀음을 특집으로 내놓고도 장사를 해먹는 잡지사 사장 머리속이 궁금하다.
" 나 원장님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건 뭐죠?" 아니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은.. 당신은 다른남자를 상상하며 음식을 만드는 일이 있나요? 하는 것이다.
" 호호..그야 당연히 우리 가족이죠. 제게 가족은 소금같은 존재에요. 가족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라는 존재는 말이죠."
그녀가 끊길듯 끊어지지 않는 웃음을 웃는다. 나도 웃는다. 그게 예의일 것같아서 웃는다. 그러나 하나도 우습지 않다.
" 가족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뭔가요" 아니다.. 당신이 혐오하는 음식이 뭔가요? 라고 묻고 싶다.
" 제가 해주면 뭐든 잘먹죠. 정성이 들어가니까요. 전 가족을 위해 요리할 때가 가장 즐거운걸요.호호.." 역시나 끊기지 않는 웃음을 보낸다. 나도 짧게 웃어주고 대충 마무리 한다.
속이 비어서인지 울렁울렁한다. 마치 식용유 한컵을 들이킨 느낌이다. 빨리 집에가서 양푼에 밥 비벼서 먹어야지 하는 생각뿐이다.
스탭들이 정리를 하기 시작하고 나도 가방을 주섬주섬 챙겨서 작별인사를 하기위해 그녀를 눈으로 찾는다.
어디갔지? 안보이네 ..싸가지 없다고 하기전에 인사라도 하구 가야하는데..
스튜디오 구석 작은 의자에 앉아서 통화를 하고 있는 그녀의 등이 눈에 들어온다. 뒷 목선에서 엉덩이까지 흐르는 선이 곱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런 뒷모습을 가진 여자는 흔치 않다.
통화를 방해할까 싶어 조용히 다가가서 기다린다. 본의 아니게 그녀의 통화 내용이 다 들린다.
" 지겨워, 증말..아줌마 없는데 어쩌라구, 라면 먹으란 말야 라면은 뒤집어 쓰라고 있는게 아냐, 또 뒤집어 쓰고 싶어서 난리야? 라면이면 된거지 더 뭘 바라냐? 엉? 더 좋은거 먹구 어디다가 힘쓸라 그래? 힘쓸데도 없는 인간이... 라면이라도 멕여주면 고마운줄을 알아야지 나이 서른셋에 생과부된 여자한테 미안한줄을 좀 알란말야.. 그리구 병원도 인제 가지마! 가도 아무 소용없는거 괜히 소문만 나니까.. 라면 먹구 설거지 해놔. 힘은 그런데 써야지, 안그래?" 그녀의 목소리가 뱃속 깊숙히에서 나온다.
나는 인사를 생략하기로 하고, 가벼운 걸음걸이로 건물을 빠져나온다.
지하철 안에서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한다. 하하하하. 지금쯤 그 허우대 멀쩡한 그녀의 남편은 라면을 먹고 있을것이다.
갑자기 라면이 먹고 싶네.. 양푼 비빔밥 말고 라면을 끓여서 라면 용기에 이쁘게 담아서 상을 차려서 김치에 먹어야 겠다.
가끔은 가진게 없어서 행복한 일도 있는 법인걸...오늘 알았다.
어느새 울렁거림도 싸악 가시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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