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년 1월6일.
양가 부모님이 모두 동석한 자리에서 나는 맞선 이라는 참으로 어색한 시간을
보내며 지금의 남편과 처음 얼굴을 대하게 되었다.
내나이 28살이었고.
친정아버지의 성화로 나는 그간에 몇번의 맞선을 보았고 그날도 집안의 소개로
청량리 옛날 맘모스 호텔 커피숍에서 얼굴은 시커멏고 키는 어느정도 큰키에
안경을 쓰고 양복에 바바리 코트를 입은 노총각을 만나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가슴이 울렁이고 뭔가 철렁하고 내려 앉는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내나이도 조금 있으면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였고...
나는 정확히 대단히 내세울 조건을 가지고 있는건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눈은 높게
두고 있던 터 였다.
그런 나에게 남편의 조건은 아주 편하고 부담없는 상황이었다.
대학 졸업후 입사한 직장에서 열심히 자기 발전을 하고 있었고
5형제 장남이지만 손위 시누이가 둘이고 출가.
손아래 시누인 나랑 동갑이지만 오빠보다 먼저 출가.
남은건 시동생뿐..
아버님께서도 경제적인 능력이 있으시고 모시며 봉양할 만큼 어렵지 않으셨고...
사실 좀더 정확한건 남편이 정감이 가는 사람이었다.
그리곤 그해 10월 6일 노처녀를 구제해 준다는 남편의 외침에 결혼식을 올렸다.
지금도 남편의 주장은 변함이 없다.
아이들 앞에서도 엄마 노처녀 구제해 주느라 아빠가 들인 경비가 수억이 넘는단다.
사랑하는 남편과 나는 딸아이만 셋을 낳았다.
내 남편은 자기 주장이 뚜렷한 사람이다.
절대로 부모에게 기대지 않고 부모님 언제라도 힘 없어지시고 큰아들 찿으시면
모셔다 같이 살아야 한다고 한다.
지금까지 내가 아는한 다른데로 눈길도 주지 않은 사람이다 아니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남편이 지금 나로 인해 힘들고 괴로울 것이 확실하다.
얼굴에는 힘든게 눈에 띄일 만치 확실한데 잘 참고 견뎌주고 있다.
결혼후 올 봄 까지 나의 남편은 어디가서 십원짜리 하나도 빌려 보거나 아쉬운
소리 한번 해본적 없는 사람이다.
오히려 더치 페이 하자고 하고 자기가 술값이며 법인 카드 없을땐 자기 카드로
거래처 접대까지 하고 나중에 결제날이 다가오면 알아서 주지 않으면 자기 입으로
돈 달라고도 못하는 그런 성격이다.
내가 무어라 중얼대면 그사람들 돈이 없으니까 못주지 일부러 그러겠니? 다 알고
있으니 먼저 처리해~ 라고 하는 사람이었다.
회사일로 출장을 가도 자기 지갑 털어 먼저 쓰고 나중에 출장비 올려 나오면 공돈
같아 나 쓰라고 주는 그런 사람..
시댁에나 친정에 대소사에도 형편껏 알아서 하는 거라며 나에게 모든걸 위임해 준
사람이다.
다름 사람처럼 자기 부모님께 며느리 따로 자기 따로가 절대 없는 얼마를 무엇을
하든 할 수 있는 만큼만 알아서 하라며 신경 않쓰게 하는 사람이다.
그런 나의 남편이 내가 저질러 놓은 일에 대한 뒷 수습을 하느라 요즘 여간 피곤한게
아닌데도 속이야 타겠지만 겉으로 드러내 놓고 질타나 책임 추궁은 절대 않는다.
그동안 가정 경제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이 아닌가 간혹 생각하던 나의 생각이
정확히 실수 였음을 새로이 깨닫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모든 것에 나를 믿고 맏기고 배려해 주던 것이었다.
물론 나도 그간에 알뜰 살뜰 열심히 살았었다.
남편과 시댁에 할도리 다하고 힘들었던 imf 때도 전혀 내색 하지 않고 오히려 그시절에
내 집 장만도 했다.
어렵게 모으고 가슴 부풀어 장만한 지금 우리의 보금자리를 내놓았다.
내가 사업이라고 하며 덩어리로 만들어 놓은 모든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마음으로 단단한 각오로 새로이 시작할 것이다.
언제나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내 뒤에서 바람막이로 혹시나 어디로 날라가 버리지나
않을까 지켜주고 있는남편과..
사랑하는 아이들이 눈앞에 재잘거리고 있으니 반드시 일어나서 달려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바람막이 남편이 너무 힘들어 버거워 하다 쓰러지지 않기 만을 나의 신께 간구하며
내 삶에 오늘도 최선을 다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