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따라 전화조차 침묵을 하고... 벽 한켠에 자리한 커다란 괘종시계가 유난히 위엄있어
보인다.
가끔 사무실 문을 열고 환기도 해주고, 밖의 풍경도 감상도 하건만 오늘은 추워서 닫아
놓았다.
사무실 문 옆으로 긴 사각 거울이 말없이 사무실을 비추고 있고, 그 옆에는 대형 지도가
걸려있다.
그 밑으로 짙은 갈색 소파와 탁자 그리고 TV도 있고... 양 옆으로 관음죽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란 화분이 있다.
내 책상위엔 컴퓨터, 작은 탁상용 캘린더와 작은 책꽂이하나, 항상 끼고 사는 머그잔 하나.
왼쪽으로는 작은 전기히터 하나, 그 위로 전화기와 서류들... 물에 꽂아 놓은 러브체인....
오른쪽 옆에 2단 서류함위엔 팩스한대 그 옆으로 정수기가 놓여 있다.
사무실 중앙엔 캐비넷가스난로가 사무실의 온기를 주고 있다. 조금 더 추워지면 석유난로가
나오고 그 위에 주전자가 놓일 것이다.
3평 남짓한 이 공간이 하루에 8시간씩 일하는 나의 공간이다.
일이야 그리 많지도 않고, 사무실에 나 혼자 있는 시간이 6시간 정도 되니...
그야말로 이 나이에 일할 수 있다는 걸 감사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더구나 스스로 알아서 일 처리를 해야하니, 나 같이 잔소리 싫어하는 일꾼한테는 딱 맞는
곳이다.
이 곳에 오기 전 난 동사무소에서 2달 동안 일을 했었다.
공공근로... 남편이 백수생활을 하면서, 여기저기 일자리를 찾아 헤매던 내가 누군가에게
듣고 찾아 간 곳이 동사무소였다.
그리곤 내가 일할 수 있는 곳이 있느냐고 물었었다.
그때까지도 공공근로라면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길가에서 휴지줍고 청소하는 것일 줄만
알았었는데, 시청, 도서관, 동사무소, 방과후 교실등 일 할 곳이 많이 있었다.
게다가 컴을 할 줄 알았던 덕분에 나이는 많았지만, 시청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시청은 집에서 버스를 타고 30-4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었으니 출퇴근에 1시간 이상을
허비해야 했지만, 전업주부로 10여년을 보냈던 내가 다시 시작한 사회생활이었기에 먼 줄도
모르고 사람 많은 버스에 즐겁게 오르곤 했었다.
그전까지 나는 절망상태였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남편의 부도로 천국에서 나락으로 떨어진
한 언니를 만났다. 그 언니는 지하 단칸방에서 세식구가 살고 있다고 했다.
내가 제일 불행하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 언니에 비하면 가진 것이 많은 사람
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게 닥친 건 불행도, 어려움 축에도 끼지 못하는 그런 것이었건만, 나는 그
작은 어려움을 극복 못하고 절망속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던 것이었다.
학비를 벌기 위해 휴학을 한 대학생도 있었고, 하던 사업 거덜내고 이것 저것 하다가 아예
공공근로로 나선 사람도 있었다.
그 전까지 남편이 갖다 주던 돈으로 편하게 살림만 하던 내가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났다.
비록 적은 금액이었지만, 일정한 수입이 생기자 남편만 닥달하던 난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공공근로란게 세달에 한번씩 신청서를 내야만 했고, 그곳에서 나에게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 주었던, 한 어줍잖은 권위주위에 사로잡힌 공무원으로 인해 그 곳을 그만 두었다.
그리고 시작한 일이 입시학원의 워드 아르바이트였다.
엄마가 집에서 일을 하자 딸아이의 입이 함지박만 해졌다.
하지만, 아침잠 아껴가며, 밤잠 설쳐가며 어깨가 빠지도록 학생들의 시험문제를 작성해봐야,
수입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땐 남편도 다시 일어서기 위해 이것저것 알아보고 다니던 중이었다.
난 부업을 그만 두고 다시 공공근로 지원서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집하고 가까운 동사무소
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내가 하는 일이란게 주로 인감증명서를 찾아다 주는 일이었다. 주민등록등본이야 컴퓨터로
처리가 되지만 인감증명서를 작성하는 건 아직 전산화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인감신청을 하면 일일이 찾아서 대조를 한후 증명서를 발급하게 되어 있다.
단순한 일이었지만 열심히 일했다. 인감증명서와 주민등록표가 출생연도별로, 가나다순서로
되어 있었는데 택이 다 낡아 너덜너덜하였다.
그래서 남는 시간 틈틈이 그 택을 다시 작성해서 깨끗하게 붙여 놓았고, 워드를 할 줄 아는
지라 틈틈히 주민등록등본을 떼어주는 일도 하면서 그렇게 열심히 2달동안 동사무소 일을
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동안 열심히 일하는 나를 눈여겨 보셨던 한 주사님이, 선배님이 하는 작은 회사에서
사무실 일을 봐줄 아가씨를 찾는다는 소리를 듣고, 나를 추천하셨다고 한번 가보라고
하셨다.
그래서 다니게 된 곳이 지금의 이 사무실이다.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 6개월이 넘었으니 정말 세월이 빠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집에서 5분 거리밖에 되지 않는 위치에 사무실이 있고, 딸아이 학교하고도, 남편
문구점하고도 가까운 그야말로 나에게 딱 맞는 그런 곳이다.
난 늘 행복은 꿈꾸는 자의 몫이라는 생각을 하며 산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내일은 희망이 있음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