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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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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이야기


BY 다정 2003-09-13

따뜻한 이야기
 재수술을 예약한 채 막내딸을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파리해진 얼굴의 딸을 바라보니 가슴이 미어집니다. 허리디스크가 심해서 거동이 불편한 아내의 통곡 소리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냥 엉엉 소리내어 울고 싶지만 주위 시선이 두려워 하염없이 흐르는 박씨 아저씨의 눈물의 이야기에 제가 썼던 글들입니다.
  너무 마음이 아프시다며 도움을 주자고 눈물을 흘리시던 교장선생님! 숙연한 모습으로 듣고 있던 선생님들, 내 일같이 동참해서 도움을 주셨던 학부모님들 아름다운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천만원이 넘는 성금을 모아 고통을 조금이나마 나누고자 했던 작은 실화입니다.

    이른 아침입니다. 박씨 아저씨는 아무도 없는 운동장을 지나 자신의 일터인 잠동 초등학교 급식실로 향합니다. 함께 근무하는 아줌마들보다 30분 일찍 출근해 하루의 일과를 준비합니다. 힘도 들고 보수는 아주 적지만 마음은 행복합니다. 오늘도 맛있게 점심을 먹을 1400여명의 학생들의 식사준비를 한다는 사실이 마냥 기쁘기만 하답니다. 하얀 위생복을 입은 아저씨는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행복한 표정을 가만히 지켜보고 잠시 휴식시간을 가집니다.  왕방울 만한 눈망울을 굴리며 늘 변함없는 표정으로 일년 팔개월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누군가 아저씨께 인사라도 하면 그저 반갑지만 아는 체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며칠동안 아저씨가 보이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우리 한 번 궁금한 마음을 가지고 아저씨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을래요!
  아저씨는 부모가 누군 지도 모르는 이름도 성도 없는 고아였습니다. 고아원을 하는 양부모를 만나 지금의 '박길용'이라는 이름을 가졌고, 중학교 1학년이 될 때까지는 50여명의 다른 고아들과 제주도에 있는 고아원에서 생활을 하였답니다. 지금도 아저씨의 소원은 친부모를 한 번이라도 만나고 싶은 것인데 만날 수 없어 그때마다 설움이 북받쳐 울곤 하십니다.
  중학교 1학년 때 고아원을 뛰쳐나온 후 구두닦이. 신문배달, 광고 전단 붙이기 등 힘들고 험한 일은 다 하였습니다. 아무도 원망하지 않고 열심히 살았지만 늘 배가 고프고 추위에 떨곤 하였지요. 그러다 천호동의 작은 교회 목사님을 만나 교회 일을 도우면서 살았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을 믿으며 감사하고 살았는데 목사님과 사모님이 교회 돈을 가지고 도망을 가버렸어요. 교회에서 쫒겨난 아저씨는 목사님의 어머님인 할머니까지 모시고 낮에는 리어카를 끌며 짐을 나르는 일을 해서 할머니를 부양했답니다.
  얼마 뒤 할머니는 떠나고 아저씨는 농사일을 하는 집에 머슴으로 들어갔습니다. 논 3천평, 밭 4천평의 큰 농사일을 혼자서 해냈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가축을 돌보는 일 청소와 온갖 궂은 일은 도맡아 해야 했습니다. 주인집에서는 먹고 자는 일만 제공했을 뿐 돈도 한 푼 주지 않았습니다. 항상 아저씨가 장가갈 때쯤이면 장가도 보내주고 그때 한꺼번에 돈을 쳐주겠다고 말로만 약속을 한 거지요. 지금도 아저씨가 가장 후회스럽고 마음 아픈 일은 고아원 원장님이셨던 양아버지의 부음을 듣고도 주인이 보내주지 않아서 가보지 못한 일이랍니다. 키워준 부모도 부모인데 늘 마음이 아프다고 하시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어느 덧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아저씨는 군대에 가게 되었고 군대 제대후 지금의 부인인 아주머니와 결혼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는 모습을 본 주인집 친척인 장모님이 사위를 삼으신 거지요. 아저씨는 가족이 생겨서 너무 기쁘고 행복했답니다. 그런데 장가도 보내주고 돈도 주겠다든 주인은 돈 한 푼도 주지 않고 그냥 나가라고만 해서 아저씨는 빈 몸으로 부인과 함께 쫒겨 나는 신세

가 되었어요. 주인이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 무척 섭섭하고 속상했지만 마음 속으로만 눈물을 흘렸답니다.  그때는 아저씨를 도와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며, 20년 동안의 고생이 헛수고로 끝났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지 뭐예요. 그래도 남을 원망할 줄 모르는 착한 아저씨는 제재소에 취직해서 열심히 일을 했어요. 그런데 3년이 지난 어느 날 제재소에 불이 나서 직장을 또 잃게 되었답니다. 이때부터 아저씨는 막노동을 시작했어요.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열심히 했답니다. 부인 역시 난전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일을 했지요. 일도 힘들고 살아가는 일이 힘이 들었지만 딸과 아들의 재롱을 보며 더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래도 생활이 어려워 아저씨는 6년 동안 일년 내내 40도가 넘는 사막의 나라인 쿠웨이트와 부르나이아에서 6년 동안 건설 현장에서 땀을 흘리며 일을 하셨답니다.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만 꼭꼭 부인한테 부치고 6년 후에 돌아와 보니 부인이 열심히 아껴서 저축하고 난전에서 장사한 돈을 모아 지금 살고 계신 시영아파트 13평에 입주하시게 되었답니다. 아저씨는 먼 외국에서 부인은 시장난전에서 피땀 흘려 노력한 결과였어요. 이때부터 아저씨는 막일과 행상을 하시다 공공 근로일을 하시게 되었답니다. 1년 8개월 전에 우리 학교에 공공 근로일을 하시다가 열심히 일을 하시는 모습이 서무부장님 눈에 띄어 학교 급식실에서 일하시게 되었지요.
 이렇게 열심히 착하게만 살아온 아저씨에게 가혹한 시련은 끊임없이 일어났어요. 부인이 그동안 고생을 많이 한 탓이지 허리디스크에 걸려 제대로 걸을 수가 없게 되었답니다. 나가서 돈을 벌 수는 물론 없고요. 고등학교에 다니던 막내딸이 학교를 중퇴하고 취직을 해서 생활비와 엄마 약값을 보탰답니다. 아픈 부인을 돌 볼 사람이 없어 언니 되시는 분이 가끔씩 돌보아 주셨는데 그 분도 신장을 떼어 아들에게 주고 당뇨병이 있으신 분이랍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아저씨는 묵묵히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우리 학교 학생들의 식사준비에 온 힘을 기울였지요. 한 번도 결근한 적이 없는 아저씨였는데  며칠동안 학교를 못 나오시더니 이번에는 학교를 그만 두시겠다는 거예요. 시집도 가지 않고 부모님을 위해 생활비를 벌던 막내딸이 갑자기 숨이 막혀 병원에 갔더니 '급성 심근경색'이어서 급하게 수술했는데도 동맥이 터져 버리는 불행한 일이 생겼답니다. 앞으로 재검사와 재수술이 남았는데 잘못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딸이 서른 두 살이 되도록 시집도 가지 않은 것만도 가슴이 아픈데 죽을 지도 모르는 지경이 되었으니 아저씨 마음이 얼마나 아프신지 통곡을 하셨대요.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당장 먹고 살 생활비며 딸의 수술비, 부인의 치료비가 하나도 없다는 딱한 사정입니다.
  박씨 아저씨는 현재 우리 학교 급식실에서 여러분을 위해 땀을 흘리며  일하시는 분입니다. 어렵고 힘든 환경에서도 남을 원망하지 않고 남보다 열심히 살아온 아저씨를 위해 우리 모두 정성을 모아 도와주지 않으렵니까?      

2002년 3월 26일
            서울 잠동초등학교 전교어린이 회장 이 홍 구
               사랑의 손길을 기다립니다.

  봄기운이 느껴지는 희망찬 날을 맞이하여 학부모님 가정에 봄 향기처럼 행복이 가득하길 빕니다.
  먼저 학교와 선생님을 믿고 열심히 학생들의 교육에 뒷바라지 해주시는 학부모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옛말에 '십시일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열 사람의 작은 정성이 모여 한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뜻이 들어있는 말입니다.
 우리 학교 급식실에서 일용직으로 근무하시는 박길용 기사님의 너무나도 안타깝고 딱한 사연을 알려 드리고 , 학부모님의 따스한 사랑과 정성을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박기사님은 현재 디스크를 앓아서 거동이 불편과 아내와 서른 두 살의 출가를 하지 않은 딸과 시영아파트에서 어렵게 살고 계십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생활비를 벌던 딸이 지난 주 갑자기 숨이 막힌다고 해서 병원 응급실에 갔더니 '급성 심근 경색'이라며 바로 수술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수술 도중 동맥이 터져 수술을 포기한 채 집으로 데려 왔는데 4월 8일에 재 검진을 하고 6개월 후에 재수술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재수술을 하더라도 고칠 수는 없다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부모로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출가까지 시키지 못한 아픔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대했을 때의 심정이 오죽했겠습니까!
  병간호를 위해 학교를 그만 두어야 할 처지가 된 박기사님은 딸의 수술비와 부인의 디스크 치료비는 고사하고 생활비조차 걱정해야할 형편입니다.
  박기사님은 부모의 이름과 얼굴도 모르는 천애 고아로, 지금까지 숱한 어려움을 겪고 이겨내면서 살아왔는데 이제는 더 이상 희망도 자신도 없다고 하십니다. 하루에 2만6천800원이라는 적은 보수에도 불구하고 아침이면 제일 먼저 출근해서 우리 어린이들의 식사준비에 정성을 쏟으신 너무나도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묵묵히 성실하게 살아온 그 분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것,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 산 교육이라고 여겨집니다. 그 분의 눈물과 한숨을 그냥 보고 있을 수만 없어서 우리 잠동 초등학교 어린이들과 교사들은 기사님을 돕는데 앞장서기로 했습니다.  잠동 초등학교의 한 식구인 박기사님을 돕는 일에 학부모님께서도 적극 동참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
  끝으로 사랑이 깃든 성금액은 봉투에 넣어 담임선생님께 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02년 3월 26일
    
                     서 울 잠 동 초 등 학 교 장  박 승 봉

 

 

 

내 딸을 제발 살려 주세요

   수술 도중에 도저히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재검진과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냅니다. 나오는 게 한숨이고 절망감뿐입니다. 그렇게 어렵고 힘든 세월을 보냈지만 요즘처럼 자신이 없고 살기 싫은 적은 없었습니다. 늘 '열심히 살다보면 잘 살날도 있겠지'하며 서러움과 힘든 것도 꾹꾹 참으며 여지껏 살아왔는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서른 두 살이 되도록 생활비를 버느라고 시집도 가지 못한 막내딸입니다. 집안 형편이 어렵다고 불평만 하며 10년 전에 가출한 딸 때문에 가슴이 못이 박혀있는데  부모를 위해서 제 모든 것을 희생한 내 막내딸에게 하늘에서 상을 내리지는 못할망정 죽음까지 몰고 가는 병을 줄 수 있나요?
  오늘은 세상이 원망스럽고  부모로써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제 자신이 너무 싫고 아내에게는 그저 미안할 따름입니다. 기구한 팔자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고 살아도 불행한 일만 생기는지 신이 원망스럽습니다. 나를 버린 얼굴도 모르는 부모도 원망해 본 적이 없이 죽기 전에 한 번 얼굴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하고 살았고, 어렵고 힘든 세상이라도  열심히 살았는데............
  제 딸의 병명은 '급성 심근 경색'이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4월 8일날 재검진을 한 후, 결과를 보고 6개월 후에 재수술을 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수술해서 살기만 한다면 그러다가 '무슨 돈으로 수술비를 대나?' 가슴이 답답해져 옵니다. 천애 고아였던 나에게 도와 줄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없으며 처갓집으로는 유일하게 처형이 한 분 계실 뿐입니다. 그 분 역시 당뇨에 아들에게 신장이식을 해서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도와 달라고 할 처지가 못됩니다. 집에서 환자 둘을 간호할 사람이 없어 한 달에 오십여 만원을 받으며 다니던 잠동 초등학교 급식실에 며칠동안 출근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 상태라면 그만 두어야 할 형편입니다. 그만 두면 당장 생활비도 없는데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미칠 것만 같습니다.  결혼한 아들이 하나 있지만 조그만 중소기업에 다니며 제 식구 생활하기도 힘든데 병든 어머니의 치료비와 동생 수술비 거기에다 생활비까지 대야 한다면 죽으라는 소리나 똑같은 말입니다.
  저는 부모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고아입니다. 6.25 사변 전에 아동보호소에 있다가 홀트 아동복지회를 통해 한국인 양부모를 만났습니다. 그 분에게는 이미 다서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제가 양자로 갔을 때 저의 입양 문제로 양어머니와 다툼이 무척 심했습니다. 1.4 후퇴 때 양아버지는 저를 양아버지의 어머니셨던 할머니께 맡기고 제주도로 가셨습니다. 그 뒤 양아버지가 운영하시는 제주도 고아원에서 오십 명의 고아들과 함께 자랐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서울로 도망쳐왔습니다.  처음 양부모와 살던 곳으로 갔더니 친척 되시는 분이 살고 계셨습니다. 그 분이 양부모님께 연락을 해서 다시 제주도에 잡혀 내려갔다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도망쳐 나왔습니다.
  서울에 올라와서는 구두닦이, 신문배달 도적질 같은 나쁜 일만 빼고는 돈 벌 수 있는 일은 다하였습니다. 어느 날 구두를 닦는 분이 선거벽보 붙이는 일을 해보라고 하셨는데 그 분이 이범석 장군이셨습니다.
  그 분이 낙선한 뒤 천호동에서 작은 교회 목사님이셨던 안성태 목사님이 교회 일을 하면서 함께 살자고 하여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교회를 짓는다고 신도들에게 받은 돈을 가지고 도망을 가는 바람에 목사님의 어머니이신 할머니를 모시고 살다가 함께 교회에서 쫒겨 났습니다. 할머니는 어디론가 가시고 땅 주인이 농사일을 도우면서 함께 살자고 하여 그곳에서 농사일과 가축을 기르며 머슴같은 일을 했습니다.
  제가 열심히 일하는 것을 보신 주인집의 고모 되시는 저희 장모님께서 저를 사위로 삼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군대에 다녀오고 장기복무를 하는데 장모님이 찾아와 1년을 근무한 뒤 지금 아내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결혼도 시켜주고 한 살림 차려 주겠다던 주인은 돈 한 푼도 주지 않아서 장모님 댁에서 찬 물 한 그릇 떠놓고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이십 년 동안 먹고 자는 일 이외는 돈 한푼 받지 못하고 나왔습니다. 지금도 아내가 돈 한 푼 못 받고 나온 이야기를 하면 억울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양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연락 왔을 때 주인이 "친부모도 아닌데 가기는 뭐하러 가려고 하느냐?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갈 필요없다."고 하여가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후회스럽습니다.
  결혼 후 제재소에서 일을 하며 톱밥을 팔아 번 돈으로 어렵게 살았는데 삼년만에 제재소가 불타서 직장을 잃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시장난전에서 장사를 했습니다. 그때부터 막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놓고 우리 부부는 정말 열심히 살았지만 생활하기가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1963년 현대건설 사우디 현장에서 삼년, 부르나이나에서 삼년 합해서 육년을 40도가 넘는 사막의 나라에서  가족과 떨어져 땀을 흘리며 일했습니다. 큰돈은 아니었지만 꼬박꼬박 부친 돈과 행상과 시장난전에서 장사한 돈을 모아서 82년도에 시영아파트 13평에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결혼 20년만에 내 집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때는 꿈인지 생시인지 그렇게 기쁘고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가 너무 고마웠습니다. 지금도 아내에게는 늘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뿐입니다. 그런데 아내가 자주 허리가 아프다고 하더니 거동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허리디스크라는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의사는 수술을 하라고 하지만 수술비용이 없어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심해져서 일주일에 서 너 번씩 물리치료만 받습니다. 이때 저는 리어카 행상을 하였습니다.
  생활이 어렵다보니 고등학교를 다니던 막내딸이 학교를 그만 두고 취직을 하였습니다. 생활지 광고회사에 들어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제 어머니 치료비와 생활비를 대며 우리 집의 가장노릇을 해왔습니다. 가정형편을 비관한 큰딸은 10 년 전에 가출한 채 가끔 전화 연락만 올 뿐 어디서 무얼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부모로써 자식을 위해 제대로 잘해주지 못해서 그렇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내 탓이니 여기며 가슴을 쓸어 내리고 삭힙니다. 그래도 열심히 살면 좋은 일도 있겠지 하며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리어카 행상으로는 도저히 생활을 할 수 없어 행상을 그만두고 공공근로 취업사업 일을 하며 생활을 해왔습니다. 2000년 7월 3일 잠동 초등학교에서 화단에 꽃 심는 일을 하다 서무부장님께서 학교 급식실에서 일해보라고 하셔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일당 2만 6800원을 받으며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힘들어도 매일같이 일찍 출근해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갑작스레 딸이 병에 걸려 이 같은 일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렵고 힘들고 슬픈 일이 많았지만 원망하지 않고 열심히 묵묵히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 착하고 사랑스럽기만 한 내 딸을 제발 살려 주세요.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내 딸에게는 생명을! 저에게는 희망과 용기를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며 사랑의 손길을 기다리겠습니다.

                        2002년 3월 25일
                      잠실에서 박길용이 드립니다.  
       

 

 

 

 

 

 

 

 

 

 

 


가정통신
 
학부모님 가정에 행복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본교 급식실 박길용 기사님을 돕기위해 성심 성의껏 참여해주신 학부모님과 학생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봄의 훈기가 교정을 감싸듯 저희 잠동 초등학교 교실에는 사랑을 전하는 손길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저금통장을 깨뜨려온 학생에서부터 나눔을 실천하고자 하는 학부모님의 정성이 모아지는 감사와 감동의 시간이었습니다.

  사랑은 무엇과 같을까요?
  그것은 가난한 이들과 필요한 이들에게
  다가가는 것이며
  그들의 불쌍함과 애처러움을
  바라볼 줄 아는 눈이며
  다른 사람의 한숨과 슬픔을
  들을 수 있는 귀입니다.

  많은 분들이 봉투 겉면에 기도의 글과 희망을 가지시길 바란다는 내용도 담아 오셨습니다. 참다운 교육을 실천한 학생들과 실천하도록 성원해주신 학부모님들의 따뜻한 마음은 박기사님께서 절망을 이겨내는 큰힘이 되리라 믿습니다.
  다시 감사를 드립니다.


2002년 4월 3일
잠동초등학교장 박 승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