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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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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자울타리


BY 다정 2003-09-13

탱자 울타리
                                                                   홍영숙

  '탱자 울타리'라는 시를 읽었다. '혀 끝에 뱅뱅 도는 설지 않는 풍경이다'라는 마지막 연을 읽는 순간  내 마음은 따뜻함으로 충만해지기 시작했다. 내게도 탱자  울타리가 추억의 갈피 속에 곱게 숨겨져 있어서이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동화 속의 집처럼 아름답게 떠오르는 집이 있다. 노란 탱자로 울타리 쳐져 있던 초등학교 시절의 친구 집이다. 낮이면 탱자 울타리 사이로 개나리꽃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정겹게 미소짓고 있었다. 밤이면 별이 보석처럼 빛났고, 대보름날이면 마을 사람들이 달맞이하러 가던 집이다.
 초등학교 시절이다. 학교를 중심으로 북쪽으로 향하는 토곡 마을을 제외하고는  남쪽으로 향하는 곳에 집들이 있었다. 주택가이자 상가였던 우리 집이 있던 마을과 그 마을을 뒤로하고 대나무 숲을 지나야 나왔던 고아원 친구들이 살았던 동네 소나무 숲을 지나서도 한참을 걸어가야 했던 바닷가 마을의 을 제외하고는 아마도 그녀의 집이 가장 멀었으리라. 하교 길은 몇 갈래로  나위어 나뉘어 나뉘어지는 원거리 통학신작로 길을 지나 도랑물이 흐르는 논둑길을 지나면 산밑에 옹기종기 마을이 있었다. 그 마을을 돌아 산비탈 경사가 약 40도나 되는 돌계단을 오르다 지칠 때 쯤이면 도착하는 곳,  산중턱에 키재기를 하며 언덕위에 서있는 두 채의 집이 있다. 한 채는 친구를 통하여 이름만 알고 있던 목장을 하는 선배 언니의 집이었고, 다른 한 채는 노란 탱자 몇 개를 얻어와 머리맡에 두고 냄새를 맡곤 하던 친구집이었다.
 산언덕을 중심으로 계란형으로 넓게 둘러쳐져 있던 탱자 울타리속에 그 집은 내게는 동화속에 나오는 집이었다. 까만 눈망울과 동그스름한 얼굴에 곱게 딴 갈래머리를 한 그녀조차도 책속의 주인공처럼 느껴질때가 종종 있었다. 봄이면 뻐꾸기 소리, 여름이면 매미소리와 함께 들려오던 그녀의 작은 오빠가 부르던 하모니카 소리는 교향곡으로 들릴만큼 감미로왔다. 지금도 어쩌다 하모니카 소리를 들으면 촘촘한 가시 사이로 탱자들이 음표되어 춤을 추는 환상에 사로잡히곤 한다. 오랜시간 '알프스 소녀'의 하이디와 함께 그녀와 탱자울타리를 떠올리는 건 어린시절의 낭만적인 추억이다.
 마을에서도 한참 숨을 몰아쉬면서 올라가야 했던 그 집은 기역자 모양의 양철집이었다. 기역자로 꺽어지는 방과 방 사이 부엌에는 두레박으로 물을 길러올리는 작은 우물이 있어 물을 펄때마다 두레박 소리는 긴 여운을 남기곤 했다. 부엌의 창살 사이로 간간히 비치는 햇살외에 언제나 습기차고 어두웠던 그 우물 또한 신비스러웠다. 함석으로 만든 두레박으로 물을 길러 올린 그 다음날은 어깨가 욱신욱신 아프기도 했다. 그러나 한여름 그 물맛은 시원하다 못해 달콤하기까지 하였다. 왼쪽 마당가에는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막은 작은 빨래터가 마련되어 있고 검은 빛이 도는 넓적한 바위의 빨래판은 빨래 방망이와 함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아름답게 느껴진건 탱자 울타리와 조롱조롱 매달려 있는 노랗게 익은 탐스런 탱자였다. 그런점에서 사는 친구가 얼마나 부러왔는지 모른다. 어린 마음에 탱자 울타리가 그 집을 지켜주는 수호신인 줄 알았다. 겨울이면 모진 바람을 막아주고 봄이되면 뒷산의 진달래와 함께 어우러져 초록의 잎을 틔우곤 하였다. 어디 그뿐이랴! 초록빛을 띤 탱자가 익어갈 무렵 따사로운 햇살과 함께 물감을 짜놓은듯한 울타리를 돌며 숨바꼭질을 하는 재미는 그리움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