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감동 긴여운
스승의 날을 맞아 편지를 받았다. 3년 전 제자였던 인수한테서 온 편지이다.
그 당시 6학년이었던 인수는 용모는 준수한 편이었으나 공부에는 전혀 흥미가 없어 필기조차 제때 하는 법이 없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싸움질이고 거친 욕설은 듣기가 민망할 정도로 습관화되어 있었다. 지나치리만큼 반항기가 있는 표정과 말투는 당혹감과 함께 무척이나 나를 지치고 힘들게 하였다. 그런데 졸업식날 엉엉 소리까지 내면서 우는 아이는 어이없게도 인수였다. 어찌 그리 섧게 우는지 ... 웃고있던 아이들조차 입을 실룩이며 따라 울게 만든 아이다. 졸업을 한 이후에 가끔 찾아오기도 하고 스승의 날이면 장미꽃 세 송이를 들고 와서는 유순하고 점잖은 모습으로 앉아 있다가 사라지는 기특한 면도 있다..
'스승의 날 장미꽃 세 송이를 들고 왔다 갔는데 웬 편지를...?' 초등학교 저학년 보다 더 균형이 잡히지 않은 필체를 보며 기대 없이 편지를 꺼냈다. '선생님께'가 아닌 '스승님께' 라는 호칭으로 시작된 편지를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는 동안 세련되지 못한 글씨가 보석보다 영롱하게 감동이라는 빛을 발하는 것이었다. '항상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려고 하신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다는 초반의 글은 중학생이라 생각하는 수준이 높아진 탓이라고 가볍게 넘기려는 데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저는 선생님을 한시라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선생님 저는 그때를 못 잊어요. 한겨울 추운 날 선생님을 위해서 아이들이 힘을 모아 우리 교실 바로 아래 운동장에서 하트를 그려 선생님을 사랑한다고 외쳤었죠. 그때를 못 잊겠습니다. 선생님을 존경하고 싶은 아이들, 선생님을 믿고 존경하는 우리 6-7반 졸업생들은 선생님을 못 잊을 겁니다.'...
잔잔하게 차 오르는 행복감은 그 날의 감동의 여운을 되살려주었다.
교직생활의 보람을 느낀 날!
아이들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이들에게서 사랑을 배운 날 이었다.
3년 전 잔뜩 찌푸린 얼굴처럼 우중충한 12월의 초겨울 날이었다. 수업시간에 집중은 하지 않고 초등학생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문제행동을 연속으로 일으키는 아이들에 대해 회의를 느껴 애정도 식어 있었다. 음산한 날씨만큼이나 우울 스럽던 나는 틈만 나면 들려주던 이야기와 시감상도 며칠째 하지 않은 채
웃음을 잃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점심시간 식사를 끝낸 남자아이들은 삼삼오오 떼를 지어 운동장으로 놀러 나가고 반장을 중심으로 한 몇 몇의 여학생이 모여 수군수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데 진눈깨비가 내렸다. 첫 눈이었다. '청승스레 진눈깨비라니, 함박눈이나 좀 내리지 않고'... 그때 유리라는 여자아이가 다가오더니
"선생님! 창문 밖을 내다보지 마세요. 조금 후에 저희들이 선생님하고 부르면그때 창문 아래를 내다보세요. 그때까지 절대로 창문 밖을 내다보시면 안돼요 꼭 약속해야해요" 하고는 하나 둘 교실을 빠져나갔다. 교실에는 나 혼자만 덩그마니 남아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손으로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운동장에서 함성소리가 크게 들렸다. 일어나서 창문 밖을 내다보니 도대체 이런 일이? 교실을 향하여 하트모양으로 늘어선 우리 반 아이들의 합창소리였다.
"선생님, 사랑해요. 정말로 사랑해요."
진눈깨비를 맞으며 오들오들 떨면서 목은 있는 대로 길게 뽑아 4층을 향하여앵무새처럼 입을 오므렸다, 닫았다하며 '선생님 사랑해요'를 합창하고 있는게 아닌가!
가슴이 찡하면서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나만 마음이 아픈 게 아니었구나. 어른인 나는 저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았는데 저 아이들이 먼저 사랑을 하는구나
"추우니까 빨리 교실로 들어와"
부끄럽기도 하고 차 오르는 행복의 포만감에 즉흥시를 지어 칠판에 적었다.
첫 눈 내리던 날
사랑해요 합창소리
하늘가를 맴돌고
피어나는 미소는 행복하여라
순수 빛깔 닮은 마음
마냥 설레고
사랑과 이해
한마음 우물 속
추억의 빛이 되어라
지치고 힘들어 보이는 선생님을 위해 '사랑 쇼'를 벌일 줄 아는 그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가슴속에 새긴 날이었다. 일기장에는 '사랑을 배운 날'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감동과 여운을 안겨준 이런 멋진 선물은 내 생애에 최고의 선물이 되어 지치고 힘들 때 등불이 되어 주리라 믿는다.
가슴과 가슴을 덥혀 주었던 그날의 이야기가 인수에게도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먼 훗날까지 따스한 온기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