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공기가 싸하다.
여름의 끝자락에서 가을로 발 디딘지 얼마 안된것 같은데
온몸으로 맡는 아침 공기가 싸하다.
어젠 남편이 낮에 점심을 먹으러 들어왔다.
요즘 들어서는 낮에 집에 오는날이 별로 없었는데
시간이 비었는지 들어왔다.
그리고 뭔가를 내민다.
"자~"
"뭔데?"
"어? 이거 헤드폰이네. 고마워 고마워"
"고맙긴. 요즘 밤에도 안자고 음악 듣고 뭐한다고 앉아있어서
내가 못자니까 사왔다."
무뚝뚝한척 한다.
난 이미 함박만한 웃음이 나온다.
그의 마음 오래전부터 내눈에 거울처럼 비치니까...
벌써 그와 만난지 스무해가 되었다.
내 인생에 반이 그와 함께였다.
첨 그를 만났을때
훤칠한 키와 남자다운 얼굴에 반했던것은 아니었다.
날보며 했던말
"나 너 만나려고 내가 갖고 있는 옷중에서 젤 좋은거 입고 나왔다."
그 거짓없는 말을 사랑하게 되었다.
내 친구 남자친구의 친구였던 그.
어느날 우연히 잠시 스쳤는데 친구에게 소개시켜 달라고 떼를 썼다고 한다.
지금은 그런다.
자기가 그때 뭐가 씌였다고. ㅋㅋㅋ
이렇게 마냥 부풀어 오를줄 알았으면 절때 안그랬을꺼라고...
그런 그와 만나 하루도 못보면 무슨일 있을까하고 6개월을 만나
결혼이라는 하나되는 의식을 했다.
스물 둘과 스물 셋에 서로를 책임지겠다는 약속을 했다.
하지만 말이 있지 않던가?
결혼과 연애는 다르다고...
현실은 날 눈물짓게 하는 날의 연속이었다.
연애시절 그 듬직했던 남자가 아이가 되어버렸다.
아빠 없는 난 아빠같은 남편을 원했는데
어머니와 떨어져 살던 그는 엄마를 원했다.
둘은 서로에게 더 많은것을 받기를 원했고
눈 흘기며 맘에 상처내는 날들이 많이 힘들게 했다.
터프하고 자기 표현이 당당했던 그의 모습이
직장 생활을 오래 하지 못하는 무능함으로 비쳐졌다.
그렇게 사랑한다고
그 없으면 안될꺼라고 생각했는데 나에게 너무나 버거웠다.
큰아이 갖고서도 너무나 많은 갈등에 무서운 생각도 했다.
이혼을 꿈꾸었다.
그러나 어찌 어찌 세월은 가고
두아이를 낳고 이젠 내가 울집에서 젤 작은 사람이 되었다.
남편에 큰소리에 눈물 찔끔거리던 난 어디로 가고
여유롭고 당당해진 내가 있다.
서로를 거울처럼 비추며 나이들어가는 우리가 있다.
난 그의 나이들어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나의 청년이며 나의 든든한 버팀목이다.
아마도 그렇게 길들여져가며 이자리에 온것 같다.
혼자서는 운전도 못하고
잔소리를 해도 그가 옆에 앉아야 편하다.
아무리 어두운 길 험한 길을 가도
그의 손을 잡으면 무서움이 사라진다.
미워 죽겠다며 악쓰고 싸워도
잠든 그의 모습이 가여워진다.
세상이 자기 맘대로 되는것 없다며 한탄하는 그를 보며
우리가 세상에 만들어놓은 작품들 얘기를 한다.
커갈수록 그의 복제품 같은 내 아이들.
내 아이들이 세상에 나가 제몫을 할때까지
그들의 든든한 후견인이 되어야한다는 사실을 안다.
요즘들어 새로 시작한 그의 일이 자리잡아지는 날까지
아직은 한참 더 힘들어야한다.
곁에서 내조자로써 힘든날들도 많았지만
아직도 끝이 없지만
나의 이 자리를 사랑한다.
나의 행복을 꿈꾼다.
그가 날 사랑하는 이유는
자기 가려운곳을 잘 긁어주는 이유란다.
매일밤 그의 가려운곳을 긁어주며
서로에 주름보며 머리에 서리보며 그렇게 그렇게 나이들고 싶다.
하늘이 우리를 부를때까지.....
박꽃 [2003-09-24,08:37]
살면서 늘 행복할수만은 없을것입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제게 최면을 걸까합니다.
난 행복하다고 난 할수 있다고 우린 영원히 사랑해야 한다고....
수선화 언니 친구를 만났는데 친구도 번호불러봐 해서 한바탕 웃었답니다.
밥님, 키키님, 고미영바라기님, 오돌또기님, 올리비아님, 아리님, 개망초님, 골무님.
그리고 친구 철걸. 모든분들.
이 가을 우리 아끼지말고 원없이 누리며 살자구요. 행복하세요.
골무 [2003-09-24,08:09]
같이한 세월만큼 서로에게 적응 되어가는지 점점 편해져 가더군요.
님의 사는 모습도 편해 보이는군요... 곱게 나이들어 좋은 얼굴을 갖고 살아 갑시다.
개망초꽃 [2003-09-24,08:09]
먼저 부럽다고 말하고 싶습니다.행복하네요 하고 말하고 싶습니다.
초가지붕위에서 달빛받아 빛나던 박꽃을 생각합니다.
같이 늙어갈 수 있는 부부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부부...누구나 꿈꾸는 거겠지요.
지붕위에 박꽃처럼...
아리 [2003-09-24,08:08]
미워 죽겠다며 악쓰고 싸워도 잠든 그의 모습이 가여워진다
바로 이 모습이 나이 들었을때의 사랑일 거라고 믿어집니다
서로에게 느끼는 측은 지심 이것은 깊은 사랑이랍니다 ...늘 그렇게 행복하십시요 ..
손을 잡으면 무서움이 사라지는 그 깊고 따스한 사랑을 ...행복한 글입니다
올리비아 [2003-09-24,08:07]
부부의 모습을 참 아름답고 간결하게 표현해 주어서
읽는 저도 정리되어가는 그느낌..그런 좋은느낌 갖고 갑니다..
가려운 곳을 긁어주어 사랑한다..ㅎㅎ
많은 의미가 있는것도 같고 아닌것도 같고...^^ 저도 그렇게 나이들고 싶네요..
서로의 주름 바라보며..흰머리 헤아려주며..
오돌또기 [2003-09-24,08:06]
"그는 여전히 나의 청년" 그런가봐요.
머리에 하얀눈이 내리고 얼굴에 주름이 늘어나도
나의 눈엔 처음만난 그모습그대로 더라고요.
마음은 점점 더 젊어지고 있으니 가려운곳도 더잘 긁어주게 되더라고요.
박꽃님 가정에 피어나는 아름다운 정경을 잘 보고 갑니다.
고미영바라기님 [2003-09-24,08:06]
부지런도 하셔라... 티비보고 커피한잔하고 눈꼽은 대충떼고난 시간이 10시인데...
자꾸늘어지는 삶이 몹시 싫지만 아무것도 할 의욕이 없네요. ㅜㅜ
사랑하는 여인은 아름다워보입니다.
수선화 [2003-09-23,13:57]
미안합니다. 아까 핸드폰으로 알았습니다.
여기와서 다시 읽으니 헤드폰이구만요.
처음에 대충 읽고 궁금하면 두번 읽는 버릇이 있다보니 생긴 버릇입니다.
나도 낯간지럽습니다.ㅎㅎ
나도 우리 남편과 한살 차이인데 내가 더 잘났다고 떠들어도 남편은 남편이더만.
한때는 남편이 대기 미운적이 많았는데 세월이 흐르니 미움보다는
그의 외로움이 더 눈에 많이 들어오데.그
리고 그의 자존심이 나의 자존심이 되고 그의 얼굴이 바로 나의 얼굴이 되대.
그래서 요즘은 덜 애먹일려고 노력해. 그가 바로 나더라구.
키키 [2003-09-23,11:12]
얼굴 쳐다보면 싱긋이 미소가 절로나는 사람.저한테도 그런 사람이 있지요 ㅎㅎ
사랑하냐구 묻는다면 사랑한다고 대답 할순없습니다.
가장 소중하냐구 믇는 말에도 가장 소중하다고 말할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아니어도 되냐는 말엔 전 또박또박 말 할수 있습니다.
절대로 그가 아니면 안된다고..나에게도 그런 남자가 제 곁에 있답니다 ㅎㅎ
철걸 [2003-09-23,09:08]
님을 통해 당신을 보는것 같아 제가 마냥 행복 하군요..ㅎㅎ
님이 건네준 헤드폰으로 세상과 접속하며 언제나 맑음.쾌청 소리만 들으시길..
효자 자식 보다 악처 마누라가 낫다는 옛말이 생각나는군요.
저도 평상시엔 늘 그자리에 있는 남편의 자리를 느끼지 못하고 살았던적이 많았는데
어느순간 어떤 사건에(?) 휩싸이면서 남편의 보이지 않던 그늘을 보게 되었지요.
그래서.. 요즘엔 남편의 그늘이 엄청 커보인답니다.
후유~ 존댓말 쓸려니 이거 원.. 낯 간지러워서..
아침 출근전 잠시 들러 내방 밤새 별일없나 확인차 들어왔다가 네글 잘 보고 나간다.
와 이리 시간이 잘가노.. 나도 할말도 쓸말도 엄청스리 많은디..
에고고!! 인자 돈벌러 나가야 쓰겄다.이따 밤에 보자.. - 철걸 -
밥푸는여자 [2003-09-23,08:51]
박꽃님의 행복한 삶의 정경을 드려다 보며
세상 많은 부부들이 그처럼 서로 위하고 아끼며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요즘 젊은 부부들의 갈등을 들어주는 기회가 많아졌는데 몹시 마음이 아픕니다
가정이라는 거 사랑이란 담을 넘어서면 그 때부터 잡초가 무성한 결혼생활이 시작되고
부부란 그 잡초를 뽑아 아름다운 정원을 일구며 살아야 함인데
서로 잡초를 향한 손가락질만으로 힘들어 한답니다 .
님처럼 하늘이 부르는 그 날까지 가려운 곳 긁어주며 살아가는 부부..
좋습니다^^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