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큰아이 학교 보내려고 깨우며 밖을 보니
첨단기기 덕인지 딱 맞아떨어지는 일기예보대로
비바람이 쳐대고 있었습니다.
요즘은 밥보다는 간단한 빵을 원해서
덕분에 정성은 부족하지만 이 에미는 우유 한잔과 빵 접시를 내놓았습니다.
큰 아이 학교 보내고
잠시후 또 작은 아이 깨어 큰아이랑 똑같은 아침 챙겨 학교로 보냈습니다.
우리집 아이들 큰아이는 고등학교 2학년, 작은 아이는 중학교 3학년이거든요.
아이들이 나같은 미래를 만들지 않기를 원하기에
늘 되풀이하며 하는 얘기는
무슨 일이든 자신이 만족하며 즐기며 할수 있는 직업을 찾아야한다고
그러기 위해선 자신의 적성에 맞는 목표를 세우기를 자주 각인시키죠.
다 이것도 나 지신이 걸어온 길에서 얻은 성과라고도 할수 있겠지요.
스물 한살에 남편을 만나서 이 사람만큼 날 사랑해줄 사람이 없을것 같아서
스물 두살에 결혼을 했고
스물 세살에 큰 아이를 낳았지요.
그 당시엔 왜 결혼하면 자연스레 직장 생활은 그만 하는거라고 생각했는지
지금도 그 때의 내 자신이 조금만 현명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스물 여섯에 작은 아이를 낳고
그 젊고 싱싱했던 시절을 아이들 기저귀 빨고 우유병 삶으며 다 보냈습니다.
친구들 중에서도 젤 먼저 결혼했기에
친구들 만나러 나가면 화려한 싱글들이 많이 부럽기도 했지요.
지금은 만나면 아이들 다 키워놓은 날 부러워 하기도 하지만
그 시절엔 젊음을 맘껏 누리며 살았던 그네들이 부럽던 때가 많았습니다.
집에서 아이들만 키우고 살림만 하던 사람이
다시 사회로 나갈수 있었던건 작은 자영업을 하게 되면서였지요.
집안에 음반업에 종사하시는 분이 계셔서
남편과 함께 조그마한 레코드점을 하게 되었지요.
누구든 들어오면 반기며 환영했건만 그리 오래되지 않아 쓴잔을 마셔야했지요.
장사라는걸 그때 알았습니다.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는 그 지루함.
학교앞에서 했기에 손버릇 나쁜 아이들을 감시해야 하는 그 불신감.
그래도 기억에 남는것 하나는 서태지 2집을 첫 판매하던날의 기억이지요.
줄서서 기다리던 그 학생들의 행렬.
매일 그랬다면 성공했을텐데....
다 부질없는 회상이지요.
가게를 정리하고
남편은 또 다른 업종을 물색하고
우린 동네에 지물포를 열어 짧지않은 기간 5년동안 운영을 했지요.
IMF도 넘기고 이럭저럭 버텼는데
늘 제자리 걸음인게 싫어서 정리를 했습니다.
그 때의 그 판단에 대해서도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아직도 걸려오는 옛 단골들의 전화.
차라리 그때 남편과 함께 가게를 지키지 않고
나는 나대로 직장을 다녔다면 지금쯤은 완벽한 자리매김이 되었을텐데 싶네요.
가게를 정리하고 생각처럼 일은 풀리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그리 길지 않게 이 직업 저 직업을 바꾸고
가게 정리했던 자금마저도 바닥이 날 무렵
그때서야 정신이 든 난 돈벌러 나가겠다고 맘 먹었습니다.
내가 할줄 아는거라고 그저 집안 살림이 다고 막막했지요.
그러다 동네에 아는 언니가 옥공장을 다니고 있기에
무턱대고 자리 좀 알아봐 달라고 했습니다.
다행히도 마침 사람을 구하던 참이라 그 자리에 제가 들어갈수 있었지요.
첨 하는 일이라 조심스럽지만 아줌마라는 이름은
소극적이던 날 적극적으로 바꿔났습니다.
하나 하나 차근 차근 열심히 배웠습니다.
손톱 마다 초록색 광약이 베겼지만 그래도 즐거웠습니다.
내가 이 일을 함으로써 우리 식구들이 더 편하게 살수있고
내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걸 해줄수 있다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근데 위기가 왔습니다.
옥이란게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이 생긴냥
점차 수요가 줄어 옥목걸이 조립하던 다른 아줌마들이 차례 차례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난 연마 파트라 그 위기도 면했는데 그만 건강에 이상이 왔습니다.
자주 체하고 위경련도 일으키고 하던것이 응급실행을 몇번하다고 초음파 검사결과
담석증에 담도에 염증도 심해서 담낭 제거수술을 하게 되었지요.
그 와중에 남편은 또 다른 사업을 구상하고
그것이 우리에겐 지금까지도 허덕이게 하는 큰 아픔이 되었습니다.
경험도 없는 사람이 야외에 식당을 벌리게 되었습니다.
그 해에도 이렇게 주말이면 비가 오고 정말 하늘이 날 버리는구나 한탄이 절로 났습니다.
그 당시 없는 돈 다 끌어다 시작했건만 빚만 안고 끝을 냈지요.
남편은 세번째 음주운전을 하고 정말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날마다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살기 싫어, 죽고 싶어, 나 이렇겐 못살아" 였습니다.
젊을때의 실패보다는 훨씬 더 크게 와닿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게 우울증인가 싶어요.
가만히 있어도 한숨과 눈물이고
사람도 만나고 싶지않고 자꾸 내 안에 날 가두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나에겐 날 걱정해주던 많은 친구들이 힘이 되었습니다.
아줌마 닷컴이 만들어준 내 좋은 친구들...
전화로 메일로 내 걱정을 해주었던 친구들...
늘 고마움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지금 난 또 다른일에 도전해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한번도 앉아 본적없는 미싱을 내 업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맘속에 배우고 싶던일이라 즐거운 맘으로 배우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예쁜 이불도 만들고, 베게도 만들고, 침대카바랑 쿠션도 만들며
하나씩 하나씩 작품을 만드는 장인의 마음(너무 거창한가요 ㅋㅋㅋ)으로
나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습니다.
아직도 넉넉하지도 않고 늘 허덕이지만
행복은 노력하는 자의 것이라는 말을 오늘도 되씹으며
내 삶의 결론을 보는날까지 열심히 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