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학생들의 전시회장이라 그런가 그다지 발길이 적었다. 사방 벽면을 둘러싼 액자들 속에 이미 안 우석의 모습은 숨겨져 있었다.
친구의 것을 찾아 초콜릿을 붙여주고 있겠지...
비록 프로들의 솜씨는 아니지만 그러나 오랜만에 평온한 여유로움을 선사받은 듯 해 오히려 얼굴모를 저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밝음에서 어두움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색채들이 네모반듯한 화폭안에서 나의 시선을 반기는 듯 하다.
어느새 안 우석은 내 곁에 와 슬그머니 서 있었다.
"아마추어들이라 아직 풋내는 나지만 그래도 대단하지? 어쨋든 뭔가에 몰입할 수 있다는 건 행복한거야. 정은이가 합창반에서 여전히 활동하는 것과 같은 경우겠지"
"어머, 제 서클도 아시네요. 혹 작년 연주회때 절 보신거에요?"
"응. 물론 그 전부터 교내에서도 지나치면서 자주 봤구 확실히 과랑 서클을 안건 연주회때 가서였어. 합창반에 우리 써클 후배가 있거든. ... 혹 궁금한게 있으면 더 물어봐."
"아니. 차차 뭐..."
우리는 그의 친구들과 헤어져 화려한 불빗을 뒤로 한 채 그곳을 빠져나왔다.
어느새 우리는 시내 한복판을 걷고 있었다.
우러러 본 밤하늘. 무척이나 아름답게 느껴진다. 밤별들이 어느사이 내게 다가와 나의 뺨을 어루만지는 것만 같다.
부드러운 손길...
"지금 정은인 무슨 생각에 그리 빠져 있는 걸까... 그런 행동은 동행자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구."
그는 약간 토라진 듯 보였다. 그의 준수한 외모는 그런 그의 뾰루퉁한 모습조차 커버할 수 있었다. 약간의 곱슬기가 있는 머리카락에 짧게 친 깨끗한 스타일, 회색빛 점버형 스타일의 겉옷, 그리고 검은색 바지에 얌전하게 끈을 묶은 검정 신발... 어두운 밤공기에 젖어들어 가기보다는 오히려 주변 분위기를 압도하리 만큼 인상적인 모습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이런 사람에겐 주위에 여자가 꽤 있을 법 한데... 왜 나랑 만나고 싶어했을까...단지 이곳에 혼자 오기가 뭐해서?
"사귀는 사람 있니? 그렇지 않고서야 남자랑 같이 있으면서 다른 남자 생각을 ... 후훗"
그는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아예 가던 걸음을 돌리고서 밤공기를 가로질러 나를 향해 서버렸다. 나의 키도 작은 키가 아닌데 내 앞에 우뚝 서있는 그의 존재는 나를 외소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날 너무 매도하네. 좀 다른 생각을 했기로서니 ...그렇다고 그렇게 다그쳐야 해요?
왤까... 갑자기 눈앞에 보이던 안 우석의 몸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야가 점점 흐려졌다. 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미안해요..."
내곁을 스쳐가는, 질주하는 차들의 경음기 소리가 온통 내 머릿속을 뒤흔들고 있다. 그를 뒤로한채 나는 뛰고 있었다. 한참을 뛰다 문득 멈추어 섰다.
혹... 살며시 고개를 뒤로 돌렸다. 어둠이었다. 어둠...
치사한 자식... 매정한 놈. 그래 별 의미없는 만남에 더이상 신경끄자... 아... 근데 내마음은 왜이리 쓰린 걸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안 우석의 자취속에 밤별들도 묻혀버렸나 보다. 차가운 밤공기가 날 더더욱 서글프게 만들고 있었다.
이순간... 누군가 내 곁에 있어준다면...
어두움속에서 물밀듯이 밀려오는 끝없는 외로움과 그리움...
10년전에도 그랬다. 10년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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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존재의 무력앞에 열두살의 여자아이는 아무 저항도 없이, 아무 피흘림도 없이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해야 했다.
무기력하게......
그 아이는 커다란, 무력적인 존재가 잠시 모습을 감춘 틈을 타 밤공기속으로 뛰쳐 나왔다. 차갑고 무섭게 느껴졌다. <따뜻한 존재가 필요했던 걸까... 자신이 보호받을 수 있는 존재...
공중전화박스로 뛰어들어갔다.
이 밤의 불길한 상황을 그는 예감했던 걸까? 유독 오늘 낮, 8개월동안 알고자도 알려주려 하지도 않던 그의 집 전화번호를 외우게 했다.
"정은아. 우리 서로 전화번호 외우자. 응? 잊어버리지 않게... 자 우리집 전화번호는 428에****. 너는?"
"우리집 전화번호는 73에 ****. 자 외워요."
그렇게 서로의 기억을 확인해가며 외운 그의 집 번호를 눌렀다.
따르릉... 따르릉...
"여보세요"
"...여보세요. 거기...민주오빠네죠."
"난데... 누구지?"
"....."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자아이는 더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더이상...
"흐흑... 흑..."
"여보세요... 정은이니? 정은이 맞지?"
"...오빠... 흐흑... 오빠...또 나 만나러 올꺼야?"
"왜그래? 응? ... 그럼. 만나러 가야지."
"... 흐흑... 오지마. 다시는 오지마..."
"정은아. 왜그래? 제발... 제발 울지말고 얘기해봐. 왜 그래 응?"
"...그냥...다시는 나 만나러 오지마. 알았지? "
"정은아. 왜? 왜 그래~...... 울지마. 응?"
"엄마가... 엄마가 다시는... 오빠 만나지 말래. 흐흑... 알았지. 다신 오지마..."
"왜...왜 그래?"
"... 흐흑... 나도 몰라. 오빠 만나지 말래. 흐흑... 다신 오지마..."
울지말아라... 왜그러느냐... 그의 다급한 소리들을 수화기 저편에 파묻은 채 여자아이는 돌아서야했다.
오빠......
그날밤처럼 서글피 운 적이 또 있을까...
다음날, 여자아이가 집에 없는 사이, 언니 말에 의하면, 그가 전화를 했고 엄마는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했단다.
"자네... 국민학생한테 뭐하는 건가. 정은이 만한 동생도 있다면서? 정은이한테 잘해주는거 동생한테나 잘 해주라구. 다시는 정은이 만나지 말아요. ... 친동생한테나 잘해줘. 알았어요?"
그 오빠는 네...라고 대답했단다.
그리고 그 뒤로 10년이란 시간이 여자아이와 그 남자의 사이에 진을 치고 만 것이다.
그날밤... 10년전 그날밤은 내게 있어 너무나도 두렵고 뼈저린 슬픔을 맛보게 한 날이었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아니 숨쉬고 있는 한 그때 그해 만큼 날 비참한 슬픔속으로 빠져들게 하지 못할 것이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