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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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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으로 (1부)


BY 로렐라이 2003-08-29

   1부

 

  스산한 가을바람 한가닥이 어느사이엔가 내 허락도 없이 머리결을 해치고 들어왔다간 붙잡을 틈도 없이 빠져 달아나 버린다.

  학교안에 들어오기까지의 진입로에는, 이미 오래전 노란 물감을 온통 뒤집어 쓰고서 이제는 한잎두잎 자신들의 분신을 기억저편으로 흩날려 보내는,양쪽 보도에 즐비하게 서 있는 은행나무들의 모습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나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노랗게 물들은 은행잎들은 끊임없는 움직임으로 깊은 상념속에 나를 잠들게 한다. 그 좌우로 이미 무참히 발가벗겨져 버린, 스산한 바람만이 감도는 논벌들이 더더욱 계절의 흐름을 인식케 한다.

  그렇군. 

  내 육신을 한없이 무기력하게 했던 그 무더웠던 여름도 여느때와 마찮가지로 소리소문없이 왔던 것처럼 그렇게 가 버렸고, 어느새 내 곁엔 가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잔디밭 여기저기 삼삼오오 무리지어 앉은, 정녕 무게의 유무를 알수 없는 막연한 웃음소리들을 내뿜고있는,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들이 내 심연 깊숙히 잔잔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끝없는, 막연한 그리움...

  ...

  여름내내 혼자라는, 사무치게 서러운 듯한 외로움속에 내 자신을 내맡겨야했고...또 다시 그렇게 고통속에서 가을을 견디어야만 하는지...

  두렵다.

  둘일수 없다는 쓸쓸함이 커저가면 갈수록 작게만 느껴지던 침대는 이젠 내게 정복치 못할 더욱 커다란, 두려운 존재로 다가서고, 무심한 시계바늘 소리는 어두운 방안의 정막을 깨고서 내 가슴위를 타고 짓누르며 결국, 새벽녘이 되어서도 잠을 못이루며 뒤척인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렇게...그렇게 십여년이란, 결코 짧지만은 않은 시간을 버티어 온 것이리라...

  아...

  "정은아! 기~다려~"

                        ***********************

  어제 저녁 늦게 지은이가 전화를 했다. 부탁이 있다며...

  "정은아, 너 내일 시간 있니?"

  "왜?"

  "왜는. 물어보는 대로 얘기나 해~. 아니, 시간이 없으면 만들어야 할정도로 중요한 일이야. 어쩔래. 내일 오후시간은 나한테 내주는 거다. 약속해 응?"

  "너 혹시... 저번처럼 이상한 일 꾸미는 건 아니겠지. 뭐.. 그런게 아니라면야..."

  "역시 넌 내 친구야. 너도 알꺼야. 왜~우리 교양수업중에 '현대사회와 인터넷'이라는 수업있잖니. 그때 너랑 안면있다던 그사람. 왜.. 안 우석이라는.. 산업정보과 다닌다는 사람말이야. 글쎄, 경희라고 내친구. 너도 아는애. 걔가 전화가 왔는데 글쎄 그사람이 너랑 소개팅하고 싶다고 그랬대. 놀랍지 않니? 강의시간엔 한번도 아는 체 하지않던 사람이 갑자기 너랑 소개팅하고 싶다고 그러니 말이다. 어쨌든! 들어온 건수를 놓칠수야 없지. 안그래?"

  "......"

  "야. 듣고 있는거야? 너 싫으면 내가 대리로 나간다. 어쩔껴? 나갈꺼지?"

  "글쎄... 너무 속보이지 않을까. 부른다고 쪼르르 달려가는 강아지 같잖아. 글쎄... 썩 내키지 않는다."

  "그래두~"

                         ************************

 흔쾌히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간다고 약속은 했으니...

 구름속을 간신히 비집고서 내리쬐이는 햇살은, 가을 햇살이 아닌 봄햇살모냥 따사롭기만 하다. 소리없이 스쳐지나가는 바람 끝자락에 머리카락은 끝도 없이 허공을 향해 흩날리고, 저항한번 못해보고 바람이 부는대로 이리저리 쫏겨다니는 낙옆들만이 내 옮기는 발 밑에서 비명을 질러댄다.

  결국, 나도 저들처럼 흉하게 일그러진 모습으로 사라져버리겠지...

  ......

  나도 모르게 어느새 정류장까지 오고 말았다.

  어쩌지?

  다시 돌아갈까?

  약속시간이 30분이나 지나버렸다. 돌아간다해도 50분경과.

  생각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벌써 가고 없겠지.

  누군 일부러도 바람을 맞춘다는데... 그러나 상대에 대한 미안함과 오늘, 이 가을 분위기가 더이상 내 발걸음을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

  땡그랑...

  문에 달린 작은 종이 들려주는 여운이 내 허전한 마음 한구석을 저며오게 한다.

  ...전에 많이 들어본 멜로디...그리 환하지도 어둡지도 않은 조명아래 커피향에 어우러져 들려오는 남녀의 애틋한 속삭거림...

  이미 가버린 걸까? 문득, 바로 옆 테이블을 보지못했다는 생각에 돌아본 내 시야로 오랜 기다림에 약간은 뾰루퉁해진, 하지만 늦게라도 온것에 대한 안도,쉽게 대하기엔 좀 어려운 그런 얼굴이 하나 들어왔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선 그 순간부터 이미 날 염탐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서서히 일어나 카운터로 다가가서 차값을 지불하곤 아무말없이 나가버리고 말았다.

  이런 당혹스러움이라니...

  이럴꺼면 왜 날 기다렸단 말이야...  남자의 기다림의 한계가 대단하다는걸 보여주려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사이 다시 문이 열렸다.

  "이 정은! 거기 계속 그렇게 서 있을거니? 어서 빨리 나와"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당황해하며 밖으로 나오는 나를 보며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어보였다.

  "자, 네가 약간(?)의 시간을 오버했으까. 자 . 빨리 가자."

  그는 나의 대답도 필요없는 듯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더욱 우스운건 그런 그의 행동에 거역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었다.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끌려가는 듯...

  자신의 걸음걸이가 빠르다고 느꼈던지 잠시 그는 주춤했다. 그리곤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변명이라도 해야..."

  "됐어. 이렇게 만났으면 됐어. 사실 기대도 않했거든. 당연히 바람맞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오히려 고마워."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네요. 그런데 지금 어디 가는거에요?"

  "아. 실은 내 친구네 학교에서 전시회를 하는데 그녀석이 와달라고 하잖아. 그래 정은이랑 같이 가려고."

  "저 ..근데 저보다 학년은 하나 위인걸로 알고 있지만 좀 그러네요. 한마디 양해없이 말을 놓구.."

  "아... 미안. 하지만 50분 기다리게 한 댓가라면 달게 받아주겠지. 하하"

  그의 쾌활하고 자신에 찬 모습은 그리 싫지 않았다. 오히려 햇살을 받으며 웃어보이는 그의 얼굴은 너무나 눈이 부셨다.

  그 순간...갑자기 떠오르는 이가 하나 있었다.

  정오가 막 지나서 였을까...

  강렬하게 내리쬐이는 햇살을 받으며 나를 향해 눈부신 미소를 보내왔던 사람...

  흰색계통(이젠 기억이 히미하다)의 옷으로 상하를 장식하고서 벤치에 앉아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나를 바라보던, 환한 미소가 가득한 얼굴...

 갑자기 안 우석이라는 사람을 통해 이 민주라는 인물을 떠올리다니...

  이미 퇴색해버린, 그러나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 한구석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남긴 10년전의 씁쓸한 기억이 세삼스레 떠올랐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내가 납치라도 할까봐? 하하. 걱정마. 댁까지 잘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