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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파를 썰다 떠날 수 있게


BY 바람꼭지 2004-02-16

대파를 썰다 떠날 수 있게


 

하얀 수염뿌리에 묻은 흙을 툭툭 남김없이 털어낸다
그의 겉모습을 싸고 있는 하얀 미사포를 벗겨내고
흰 이마에 싱긋이 흐르는 귀티나는 웃음을랑 사정없이 외면한다.

도마 위에 그의 큰 키를 누이고
서걱서걱 망설임없이 칼질을 한다.

빗금을 그을 때마다 이노옴하는
서슬푸른 호통이 들리더라도 놀라선 안 된다.

초록잎을 자를 때
끈끈한 점액의 초록 눈물을
하얀 허리부분을 자를 때 하얀 눈물을
철철철 쏟아 낸다.

대파를 썰 때마다
부끄러움없이 당당하게 흘리는 눈물의 자유로움과
황홀한 해체의 기쁨을
뒤섞어 잠시 유쾌하다.

그렇게 대파를 썰다 떠날 수 있게
기도하자.
천둥과 번개가 없는 여름 빈 하늘이 되어
떠나는 날에 고백하자.
조금 매워도 대파, 당신이 있어 국물뿐인 내 삶이
얼큰할 수 었다고......

아무일 아니라는 듯이
썩둑썩둑 대파를 썰다가
부글부글 끓는 소고기국의 맛이 다 우러날 무렵에
내가 썰어둔 대파를 남김없이 뭉텅뭉텅 누군가가 집어넣을 수 있게

시원유쾌한 푸른 눈물바다,
껄껄껄 웃으며 두손 번쩍 들어 만세부르듯 흔들며
떠날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