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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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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혼모


BY 바람꼭지 2003-08-12

혼돈의 1979년 겨울이었다.

스물둘의 가을  큰언니네집에서 기거하다가 막 언니의 보살핌을 벗어나 작은 방을 얻어 자취를 하던 무렵..

 난 부산의 모 구청에 지방행정직 공무원생활을 하고 있었다.

언니가 추풍령의 시댁에 다녀오면서 경부선 하행열차에서 만난 한 청년!

바쁜 직장생활의 와중에서 서너번 만난적이 있었을 뿐 그다지 깊은 만남은 아니었다.

그런데..

 

해외취업을 하여 외국으로 떠난다는 날을 며칠 앞두고 작별인사를 하러 온 그를 만났다.

바보처럼 마음의 경계심이란게 어디론가 다 사라지고 밤 열두시가 넘도록 무슨 얘기였는지 낄낄대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주인 아줌마와 우리 셋은 화투를 하기 시작했다.

화투판을 접으며 주인 아줌마가 날 아줌마 방에 자라고 하였고 난 그의 이부자리를 꾸며주러 나의 방에 잠시 들렀고..

5분간만 더 있어달라는  그의 간청을  난 거절 못했다.

그리고 스물두살에 난  엄청난 회오리바람에 휘말리고 말았다.

다음날 새벽 그가 펄펄 날리는 눈송이를 헤치며 아득하게 하나의 먼지가 되어 사라져갔구..

 

얼마간을 변함없는 일상생활에 몰두했지만,

아닐거야, 설마 아닐거야 하면서 하루하루

무기력하게 보내는 동안 임신의 전형적인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입덧과 태동을 거치는 동안 그 많던 태몽들..

거의 한달여를 매일매일 색다른 돌을 캐는 꿈..

 

 

스물세살에 아이아버지가 외국에 있는 동안 파란색 임신복도 입어 봤구 직장을 사표내고 아이도 무사히 잘 낳았다.

 

어제 구두 굽을 수선하면서 기다리기가 지루하여 고객용 샌들을 신고 수선센타에서 가까운 서점엘 갔다.

가다가   오른 쪽 샌들의 깔창이 홀랑 뒤집어지고 난 어쩔 수없이

발을 질질 끌며 걸었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내가 다리병신인 줄 알고 흘깃거리며 뒤돌아보는듯 했다.

아니다. 아무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내 맘만이 그들이 날 병신으로 보는걸 두려워하고 있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다 고친 내 신발을 신고서도 한참동안을 오른 쪽 다리에 이상한 느낌이 들면서 질질 끌고 걸으려하는 것이었다.

 

그 때서야 난 문득 23년전 내가 미혼모란 사실을 얼마나 부끄러워하고 있었는지 생각이 났다.누군가가 왜 처녀가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았느냐고 한 번도 말한적 없었는데 마치 자폐아처런 집에서 숨어 지냈던 그 때!

손아래 동생이 아이를 너무 귀여워해서 그만 그 애가 엄마노릇을 떠맡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었던..

 

이제 나의 큰 딸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른다.

공부를 잘하고 반듯한 외모가 자랑스러운 것이 결코 아니다.

딸애의 넉넉한 마음씨, 동생들을 잘 이끌어 주는 능력,

남편이 만취했을때에도 내가 결코 못하는 단 몇마디의 설득력으로 아빠를  차분하게 만드는 힘.

딸애가 지닌 용기와 삶의 지혜가 너무 대견해질때마다 내가 미혼모였었다는 아픈 기억이 눈녹듯 사라진다.

정말 우리 큰 딸 낳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  다리 병신이 아닌데도 괜히 부끄러워 했듯이 결혼 유무에 관련없이 남녀가 서로 사랑한 결과로  얻어진 소중한 선물을 부끄러워했던 그때의 나를

오늘 사십네살이 되어 이해하고 용서하며 사랑하려한다.

 

나는 이 순간 대한민국의 엄마인 것이 무척 자랑스럽다.

 

큰아이와 같이 딸아이를 세명 더 낳아 네번이나 자랑스런 엄마!

아이들과 살아가는 모습을 편안하게 쓰게 된것도 무지무지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