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자!
냉혈한!
아귀들이 내 머릿속에서 갉아대는 소리들이다.
이웃에 나눠주고 냉장고에 가득하니 채웠어도 아직도 박스안에 앙금처럼 남아서 내 가슴을 후벼파는 포도가 있다. 아니 오랜동안 자신을 괴롭히려 나눔의 부피를 아꼈는지도 모른다.
과일을 사 먹지 않는 여자!
그렇다. 모든 먹거리를 믿을 수 없다며 직접 재배하거나 아는 사람의 손을 통하지 않으면 사먹지 않는 깔끔한 사람이 아닌데도 난 과일사기를 주저한다.
새벽일을 끝내고 돌아와 허줄한 뱃속을 채우려 포도 박스안에서 들고온 포도 한송이가, 단내를 맡고 달려드는 초파리들 마냥 슬프고도 미운 감정을 꾸역꾸역 피워내게 한다.
애써 도리질을 해보지만 하루라도, 한순간이라도 포도를 보면서 울컥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
이 작은 한알한알에 배어있을 내 엄마의 땀과 눈물과 아픔들~
그렇게나 잦은 비가 내렸는데도 , 매미의 날개짓에 농심(農心)은 숯검정이 되었는데도, 포도의 맛은 기막히게 달기만 하다.
뼈마디가 닳아져서 무릎을 구부리지 못하고 한몸 지탱을 못해주는 발바닥에 지친 육체를 싣고 밭이랑을 헤매어도 머릿속만 맑아 질 수 있다면...
신앞에서조차 용서받을 수 없는 전생의 업이라고 자책하는 한 여인의 기구한 운명!
알면서도, 그 마음 너무나 잘 알면서도 고개를 돌리는 비겁자.
그녀 앞에선 동조의 눈물 한방울도 흘려 주지 않는 모진 냉혈한.
철이 나지 않은게다.
강한척, 바쁜척, 잠시라도 잊고자 도망치고 있지만 나역시 그 인생의 바톤을 이어받을 외딸인것을...
신이 있다면 따져묻고 싶다.
왜 내 어머닌 행복하면 안되냐고...
부탁하고 싶다.
이젠 제발 당신이 잡고 있는 고삐를 놓아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