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에서 남양주를 관통해 마석으로 넘어오다 이동네를 대표하는 것에 '배'가
있다는걸 오늘에서야 알았다. 그것은 남양주 곳곳에 배가 그려진 그림으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노랗고 동그란 배가 있고 그 배위에 짙은 초록색의 배나무 잎사귀인듯한
잎새가 그려져 있는 그림이었다. 그런데 배와 초록색 잎새가 그려진 그림에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보니 짙은 초록색 잎사귀가 가을에 수확해 놓은
배랑 어울리지 않는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하면
이곳을 대표한다는 배를 좀 더 효과적이게 홍보를 할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배가 생장하는 시기를 따라 봄여름과 가을을 광고판에 가득 채우는 방법이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싶었다. 배나무 가지에 꽃이 피는 봄을, 꽃이 진 자리에 파랗게 잎을 돋는 여름을,
그 자리에 하나씩 열매가 달리는 가을을 차례로 보여주는 그림을 상상해 보았다.
달랑 배한개가 그려지고 어울리지 않은듯한 초록색 잎새를 그려넣은 홍보용 그림을
대신해 그렇게 배나무의 사계가 표현된 홍보물이라...그런 그림이 그려진
홍보물이라야 훨씬 부드럽고 가깝게 다가오지 않을까.
할일없는 사람처럼 이정표처럼 서 있는 이고장 특산물인 '배'를 보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내가 우스웠지만, 문득, 배꽃에 이르러 내 생각은 옛날로 돌아가
추억에 젖게 되었다.
한 십오년 전이다. 우연이었다. 그날 배꽃의 행렬을 만난건..
나주가 배의 원산지이며 배로 하여 유명한 고장인걸 알았지만 배나무가
자라는걸 주변에서 본적이 없는지라 배라는 과일을 좋아만 했지
어떻게 꽃이 피는지 어떻게 열매 맺는지를 몰랐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이맘때였을 것이다. 고속버스를 타고 광주를 거쳐 국도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 길에 전혀 생각지 않았던 하얀꽃무덤이 숨바꼭질 하듯 나타나곤 했던 것이다.
배꽃이었다. 나주근처 국도변에서 바라보면 그렇게 배꽃행렬이 숨었다 나타나곤 했다.
하얀배꽃에 비해 줄기는 검은빛에 가까운 진한고동색이었는데
하얀색과 대조되는 줄기의 검은빛이 도드라져 보였다. 그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대비였으며 하얀색꽃이 더욱 눈부신 흰색으로 보이게 했다.
신기했다. 어쩌면 죽은듯 팔벌려 누워있는 검은줄기 위로 저리도 무수한 꽃송이들이
달릴수 있는지... 배나무는 가운데 둥치를 기준으로 양쪽으로 팔벌린듯 자라있었는데
그것이 아마도 과수원농군들이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 놓은듯 싶었다.
그렇게 일률적으로 가지를 하늘을 향해 벌리고
줄맞춰 서있는 배나무의 행렬이 강한 인상을 주었다.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리듯 가지를 뻗은 사이사이로 하얀꽃들이 다닥다닥 붙어
가운데 둥치는 검고 그 검은 둥치가 팔을 벌려 하얀꽃송이들을 떠받치고 있는 듯한
형상이었다.
개별적으로 피어 있었다면 그렇게 신비한 아름다움을 주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무리져 피어있는 그 꽃송이 들은 마치 솜씨좋은 조각가가 쌀가루를 반죽해 정성스럽게
한송이 한송이를 가지에 붙여 완성한 작품으로 보였다.
배나무 과수원은 야트막한 산이나 구릉진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었으므로
과수원 위로는 탁 트인 파란하늘이 늘 배경이 되어 주었다.
숨었다 나타나는 배꽃의 행렬을 몇번이나 만났을까, 나주를 벗어나면서
배꽃과도 작별을 하였는데 참으로 아쉬웠던 기억이 난다.
그 배꽃을 만난 사월이후, 다시 돌아오는 사월마다 그날 보았던 배꽃의 행렬이
간절히 그리웠다. 하지만 그렇게 그리워만 하다 사월을 보내고 그 그리움마저
잊고 살았는데 예서 어느날 배나무를 만났다.
이 고장 특산물로 소개된 배가 그려진 홍보용 광고판을 보면서도 어딘가 멀리 떨어진
곳을 있을 배나무 과수원을 상상했었는데 말이다.
나주에서 보았던 만큼 장하게 펼쳐진 배나무 과수원이 못 되었지만
머잖아 배꽃을 하얗게 피울 배나무가 자라고 있는걸 보았다.
그것들이 팔벌린 가지로 햇살을 빨아들이듯 서있는걸 보면서
배꽃이 하얗게 피어나는 나는 날이 머지 않았음을 느꼈다.
가슴에 작은 흥분같은것이 소용돌이를 만드는것 같았다. 저길, 아이들과
자전거 타고 와서 잠시 배나무밭에 앉아 쉬는걸 상상하는 일은, 그것은
설레임이 섞인 아름다운 기대감이 될것이었다.
햇살이 따갑다. 노란 촉수를 드리우듯 길게 자라난 개나리 가지마다
노란꽃들이 만개했다. 그 위로 진달래가 분홍빛을 뽐내고 있다. 파랗게 옷을
갈아입은 전나무 잎새도 싱그럽다. 그것들이 하나로 어울리는 봄, 너무
아름다워 눈이 어지럽다.. 하얀 배꽃의 행렬이 기다려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