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파가 물러가고 날씨가 평상을 되찾았다.
첫 번째로 궁금한 것은 다육이들의 생사다.
실내로 피난한 녀석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밖에서 추위를 견뎌야했다.
신문으로 덮고 식물용 블랭킷을 두 겹 세 겹 덮어주긴 했지만 워낙 기온이 낮아 살아날 것 같지 않았다.
이틀 전 얼음판에 넘어져 다친 엉덩이는 앉고 설 때 마다 악소리가 절로 나게 아팠다.
하지만 아픈 것보다 다육이들의 생사가 더 궁금하다.
살아있다면, 신문과 이불을 일 주일씩이나 뒤집어 쓰고 얼마나 답답할까 싶기도 하였다.
식물용 이불이 날아가지 않게 눌러 둔 나무 토막과 벽돌 조각을 치웠다.
엉덩이가 아파 나오는 비명은 입술을 깨물어 삼키고 하나하나 들어냈다.
절뚝이는 걸음으로 들어낸 나무 토막과 벽돌을 한 곳에 모으고 식물용 이불을 걷었다.
아직 신문지로 덮여 생사는 알 수 없다.
숨을 멈추고 침을 꼴깍 삼키고 조심조심 신문지를 들어내니 다육이 발디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다.
실내로 피난시킨 녀석들과 달리 웃자람도 없다.
추위를 견디느라 성장을 멈추고 있었나보다.
기특한 녀석들, 이쁘고 사랑스런 녀석들!
모든 다육이 발디가 실내로 피난하거나 이불을 덮어쓰는 행운을 얻은 것은 아니다.
그냥 노지에서 고스란히 추위를 견뎌야 했던 녀석들도 많다.
다 죽었겠지,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그래도 행여나하는 마음으로 녀석들을 살피러 갔다.
예상대로 죽어서 축 늘어졌다.
그런데 이게 뭐야, 죽은 녀석들 사이로 어쩌다 살아있는 녀석들이 보인다.
조그만 흠도 없이 말짱해 보인다.
똑 같은 환경인데 어찌 누군 죽고 누군 살았을까.
차이가 뭘까?
차이라면 잘 자라던 녀석들이 있고 같은 화분에서도 못 자라는 녀석들이 있긴 했다.
살아남은 것은 대부분 못 자라던 녀석들이다.
그것으로 모든 설명이 되진 않았다.
못자라던 녀석 중에도 죽은 녀석 산 녀석이 있다.
그 중에도 환경이 더 열악해서 더 못 자란 녀석이 살아남은 것인지 알 수 없다.
무엇이 삶과 죽음을 갈랐을까?
잡초 같은 인생이란 말이 있다.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더 강한 생명력을 갖었다는 뜻으로 알고 있다.
정말 그런 것인가.
환경이 비슷해 보여도 생명력은 조금씩 다를 수도 있는 것인가.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해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 다육이의 생사를 보며서 한번 더 그 생각이 떠오른다.
이해 안되지만 그 중 하나 분명한 것은 열악한 환경의 다육이가 더 많이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환경 탓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야겠다.
열악한 환경이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생명력일 수도 있잖을까?
아니면 어떠랴.
죽고 사는 것이 내 뜻이 아니고 하늘의 뜻이라면 그 또한 주어진 것을 탓해 무엇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