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이 차갑게 불어와 옷깃을 여미었다.
긴팔옷을 입은지 얼마되지 않은것 같은데 벌써 쟈켓하나를 더
걸쳐야 할만큼 날이 갑자기 추워져 버렸다.
일년 열두달... 그 속에 진짜 가을은 언제부터 언제까지 냐고
아이가 물은적이 있다. 편리하게 ,
봄이 3월 4월 5월 이면, 여름은 6월 7월 8월 , 가을이 9월 10월 11월,,,,
그리고 나머지는 겨울... 이런식으로 아이에게 설명을 해준 기억이 있지만
나도 사실은 그 구별이 어떻게 해야 정확한지 잘 모르겠다.
초등학교때 교과서에 배운 바로는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로...
라고 배웠는데 언젠가 부터 겨울은 너무 길고, 봄과 가을은 짧아 있었으며,
겨울은 빨리 시작되어 늦게 끝나고는 했다.
이게 이상기후의 징후인가?
실제로 입추는 8월 하순경 아니면 9월 초순에 들어 있으니 그즈음 부터 가을이라
해야 옳겠지만 실제로 느끼는 가을은 아침저녁으로 선듯한 바람이 부는
이때 즈음이라야 '아, 가을이구나'하고 느끼게 되는 것 같다.
가을이라는 때가 더욱 애매해져 버렸지만,
아직 짙푸른 여름숲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산을 보며 가을느낌을
받기엔 너무 이른감이 없잖아 있지만
목하 가을이 깊어가고 있음을 바람을 통해서 느끼게 되는 요즈음이다.
서울보다는 자연과 더 가까이 살게 되었다고
좋아하며 내려온 이곳이건만, 찾아 나서지 않으면 계절의 변화를
체감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래서, 나름대로 자연속에 살고 싶은 작은 소망을 꽃을 통해 풀어보고자
마음을 먹은 일이 있다.
다행히 오일장이 열리는 장날에 꽃수레를 끌고 나오는 아저씨가
꽃집에 비해 아주 싼값에 꽃을 파셔서 나의 바램을 어느정도 충족시켜
주었다. 작심삼일이란말 정말 그런 일에 적용하고 싶지 않아서
첨엔 정말 열심히 장날 꽃수레를 찾아 다녔는데 어느때부터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다.
봄꽃과 초여름꽃들을 일주일 간격으로 화병에 꽂아놓으며
꽃속에 노니는 기분을 만끽한 얼마 동안 그 꽃으로해서 내 마음에 맑간
하늘빛이나 빛고운 산빛이 들어와 있는듯한 착각을 해가며
꽃들을 위해 날마다 신선한 물을 갈아 주곤 했었다.
장미는 예뻤으나, 빨리 시들어 버렸다.
스타파치오는 꽃은 별로였으나 색이 예뻐서 샀는데 참 오래도 갔었다.
지겨워 질때까지 보라색 스타파치오는 끝까지 자신의 모습을 흩트려 뜨리지 않았다.
뭐가 그리 바빴을까?
오일장이 설때마다 마음을 먹으며 오늘은 가봐야지. 그 꽃수레 아저씨가
이젠 나를 기다리고 계시지 않을까? 하는 염려까지 하면서
오일장이 서는 날은 아침 부터 꽃에 대한 기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이 끝나고 저녁할 시간에 맞춰 집에 부랴부랴 오다가는
깜빡 잊거나, 정말 어쩔수 없을 정도로 시간이 바빠 장을 지나쳐 오기 일쑤였었다.
그렇게 여름을 보내고 말았다.
가을이 깊어가는 느낌을 받으면서 잊었던 꽃생각이 간절해져 가서
어젠 정말로 마음을 먹고 장이 서는 곳으로 달려갔다.
같은 시각인데도 벌써 어둑해져 오는 장날 풍경속에서
여기저기 '떨이요'를 외치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연결되어 왔다.
여름에 비해 해가 짧아진 탓이리라.. 일찍 장을 마감하고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 물건을 다 팔고 가기 위해 싸게 파는 물건들을 훔쳐만
보고 바삐 위로 올라갔다.
벌써 가져온 물건들을 다 팔고 짐을 싸는 분들도 있었지만
이미 날은 어둑해져 오는데 아직도 가져온 물건이 많이 남아있는 분들은
장보러온 사람들을 붙들고 싸게 줄테니 가져가라고 옷자락을 붙잡곤 했다.
꽃수레 아저씨가 있던 자리에 와 보니 늘 그자리에서 꽃을 팔던 아저씨가
아니 계셨다. 오랫만에 와서 내가 길을 잘못 보았나 싶어 다시 한번 살피는데도
안계신걸 보니 그간에 자리를 바꾸었거나, 그도 아니면 오늘은 일찍 파장을
하신게로구나 싶었다. 아쉬운 발길을 돌리려는데 꽃수레가 있던 자리에서
과일을 팔고 있는 젊은이가 나를 불렀다.
사과랑 복숭아랑 배가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가판대를 가리키며
'뭐든 싸게 드릴테니 사가세요' 한다.
주변은 파장 분위기로 어수선 한데 아직도 많이 남은 과일을
팔고 있는 젊은이는 의외로 웃음띤 얼굴이다.
그 여유있는 모습, 그 씩씩한 모습이 맘에 들어 생각에도 없는
과일을 사게 되었다. 황도가 먹음직 스럽게 바구니에 담겨져 있었다.
그렇게 비가 내리고 태풍이 휩쓸고 갔는데도 버젓히 익어
과일 아저씨 손에 이끌려 거기 자리하고 있는 과일들이 참으로 대견스러웠다.
그런데 과일들을 불빛에 보아도 말끔한 모양새가 아니다.
이그러 졌거나, 벌레가 먹었거나, 과일마다 한가지씩 생채기를 가지고 있는
황도가 내 눈에는 참으로 대견스럽게만 보여 그걸 한바구니 달라고 했다.
떨이라고 아저씨는 값을 깎아주셨다. 한손에 묵직하게 들려오는 노란복숭아를
들고 돌아서며 오늘은 꽃대신 과일로 만족해야지 싶었다.
그런데 나오면서 보니,늘 밀집모자의 양쪽을 말려올려 쓰시고 계시는 그 꽃파는 아저씨가
장 입구쪽에 서있었다. 거기서 꽃을 파는줄도 모르고 바쁘게 뛰어 다녔구나 싶어
헛웃음이 났지만 대신 장구경 한번 잘했다 생각하기로 했다.
가을이라서 국화꽃들이 다양하게 나와 있었다.
구절초를 닮은 하얀국화, 노란국화, 자주색이 짙은 국화,그리고
바깥쪽은 하얀데 안으로 갈수록 보라색을 가진 국화꽃등... 저마다 이쁜
색깔로 핀 국화꽃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어떤색깔을 사서 가을느낌을 우리 집에 들여 놓을까..
꽃잎 안쪽이 살짝 보라색을 띤 국화꽃이 유난히 예뻐 보이는
그꽃을 두다발 골랐다. 아저씬 오랫만에 왔다면서 덤으로 활짝 핀 카네이션을
한다발 건네 주셨다. 국화꽃을 두다발에 카네이션 한다발이라...
그걸 꽂으면 우리집이 꽃집으로 변하는건 아닐까.. 즐거운 상상을 하며
날아갈듯 가벼운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활짝 피어버린 카네이션을 먼저 손질해서 유리병에 꽂았다.
연한 분홍색이 마치도 솜사탕같이 부드럽다.
웨딩케잌에 장식된 설탕꽃같기도 하고, 얇은 한지를 접어 만든 종이꽃 같기도 하고
분홍색얇은사를 오려 만든 조화같기도 한 카네이션이 유리병의 맑은 느낌과
참 잘 어울렸다.
보라색이 살짝 도는 국화꽃 두다발은 청록색 화병에 꽂으니 또 알맞게 예쁘다.
꽃으로 해서 나의 일상은 잠시 축복받은 하루가 된다.
가을느낌을 잔뜩 풍기고 있는 국화꽃을 오늘따라 눈부시게 쏟아지는
햇살이 어루만지고 있다. 아,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