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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맞이꽃 한줄기.


BY 빨강머리앤 2003-07-31

 

내가 남편을 마음으로 받아 들였던 건

그가 '휴머니스트'라 여겨 졌기 때문이다. 또 나랑 함께 프랑스 영화를 볼 수 있을

사람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어도 내 생일이나  특별한 날엔 꽃한다발 정도는 내게

안겨줄 사람이라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꼭 그렇게 해줄것 같던 그 사람이 결혼을 하고서는 '영 아니올시다'다.

 

연애 시절,장흥 유원지에 놀러 간적이 있었다. 

장흥 유원지에서 차를 마시고 조각공원을 거닐다 한참을 윗쪽으로 올라가니 

산길로 접어드는 오솔길이 있었다. 마침 가을이었고 들판엔 들국화가 한창이었다.

언덕을 반쯤 올라갔을까, 그는 잠시 기다리게 하더니 잠시후 한다발의 들꽃묶음을 건넸다.

칡넝쿨줄기로 묶은 여러가지 색의 들국화 한다발이었다.

정식으로는 아니지만 그런 아름다운 청혼을 받았던 일이 있었다.

그 장면은 '가을동화'에서 비슷하게 나와서 혹시 그때 우리를 따라하는 건가 싶었는데

암튼, 그 아름다운 일이 내게 진정 있었던가 싶은 건

그랬던 그가, 지금은  아내 생일날 장미꽃 한송이를 갖다 주는 일이 없는 무심한

남편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외동이로 자란 그가 혼자 자란 티를 굳이 내느라 그러는지 '휴머니스트'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이기적인 면을 많이 가지고 있는것 같기도 하다.

또한 프랑스 영화는 커녕 할리우드 액션 영화도(이건 내가 안보는 장르지만) 같이 보아 줄

여유도 없는 남자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남편한테 아무런 기대도 않게 되어 버린지 오래.

그래도 꽃은 꽂아 놓고 살고 싶은데 꽃값이 만만치 않아 마음의 꽃만 품고 살아온 지

어언 십여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지방소도시인 이곳엔 오일장이 열린다. 오일장이 열리는 장날 ,

시장을 한바퀴 돌다가 시장 저 끄트머리에서 꽃을 파는 난전을 만났다.

싱싱한 꽃을 싸게 파는 아저씨는 마음이 내키면 덤도 얹어 준다.

덕분에 이제 내가 좋아하는 꽃을 거의 날마다 꽂아 놓고 살아가는 복을 누리고 있다.

 

지난 번 장에서 소국 두다발을 사왔다. 연한 보랏빛과 하얀색 소국을 언니가 직접 구운

도자기화병에 꽂아 현관에 두고 보는 중이다.

어디 밖에 라도 다녀 와서 현관문을 열면 가장 먼저 하얀미소를 던져 주는 화병의 꽃이

반갑게 맞아준다.

뮌헨에서 닥종이 인형을 만들고 계시는 김영희씨의 글중에 그런 말이 있었다.

자신은 보석을 사는 대신 그 돈으로 평생 꽃을 사는 행복을 누리고 싶다고...

나 역시 그렇다. 보석보다는 꽃을 평생 보고 사는 복을 누리며 살고 싶다.

 

지금 현관에 꽂아둔 국화꽃 속에 '달맞이꽃'한송이가 꽂아져 있다.

 

엊그제 어인일인지 오랫만에 데이트를 하자며 남편이 나를 불렀었다.

호프집에 가서 생맥주를 한잔씩 마시며 바쁜 핑계를 대고

제대로 얘기도 나누지 못한 아쉬움을 다 털고는 느즈막한 시각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집으로 오는길 여기저기에 개망초와 달맞이꽃이  어울려 피어있었다.

남편이 달맞이꽃을 들여다 보더니'달도 없는데 활짝 피어네?'라며 달맞이꽃 줄기를

꺽어 내게 주는 것이었다.

 

그 밤의 그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하도 오랫만인 탓이었을까......

그 노란 달맞이꽃 한 송이가 장미 한다발인양 감동스러웠다.

달도 없는 밤, 달 대신 노란 달맞이꽃 한송이를 들고 오는

내 마음엔 달맞이 꽃처럼 노란 등불이 하나 켜지는듯한 느낌, 참 오랫만이었다.

그 밤에 내손에 쥐어준 달맞이꽃 한송이가 주는 느낌이 각별한 건

그이 마음에 있는 사랑을 표현한 때문일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달맞이꽃을 국화꽃 사이에 꽂아두었다.

그리곤 잊고 있었는데 아침이면 여지없이 입을 다물듯

꽃잎을 접어 두던 달맞이꽃이 저녁이 되어 거실에 불이 들어오면

노란 꽃봉오리를 펼치곤 한다.

참으로 신비로운 일이었다. 

얼마간 달맞이꽃은 아침이면 잠들었다

저녁이면 피어나곤 할것이다. 그러는 동안 나는 또 꽃을 건네던 그 밤을 기억하겠지.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이렇듯 간단한 것일지도 모른다.

노란 달맞이꽃 한송이에서 사랑을 보는 며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