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무렵
남편 초등 동창 부인의 전화를 받았다.
내게 부탁할 게 있어 곧 방문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방학 중이면 늘상 있었던 일이기에
아마도 틀림없이 '봉사활동 확인서' 때문일 거라 짐작했다.
국가 시책이랍시고 하는 학생들의 수행 평가가
과연 얼마나 실효를 거두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개인적인 내 생각으론 정책 입안하는 공무원들에게 호통이라도 쳐주고싶은 심정이다.
중학생들이 봉사활동 할만한 일이 뭐가 있겠는가.
점수 받기 위해 마지못해 하는 일이 어찌 '봉사'라 할 것이며
억지로 하는 일이 열성으로 되어질 리 없을 건 뻔한 일.
그래서 문의 전화에도 안 받는다고 거절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구나 방학 끝 무렵에는
뒤늦게서야 부랴부랴 서두르는 중고생들의 의뢰 전화가 쇄도하여
귀찮을 지경이 되어 버렸다.
주변의 아는 이들은 그냥 적당히 봉사활동 했던 것처럼 서류를 꾸며달라고까지 한다.
하기야 수능이 금방인데
공부 한 시간이라도 더 해야 할 판국에
봉사활동 할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
이윽고 남편 동창 부인이 도착했다.
매월 부부동반으로 모여 온 지가 십오년 정도 되니
이젠 아주 가까운 친구처럼 흉허물없이 지내게 된 사이다.
"둘 다 고등학생이라 어차피 두 명 거 해야 되겠네?"
난 그녀가 미안해할까 봐 미리 서류를 두 장 꺼내어 두었었다.
볼펜을 잡고 막 서류 작성을 하려는데 그녀가 뜸을 들이듯 머뭇머뭇 대답을 한다.
"아니...
그냥 한 명 것만 해 줘.
하나는 필요 없어..."
"아~ 그래?"
고3인 딸 애 것만 해 달래서
아마도 아들은 다른 데서 했나보다 여겨 인적사항을 적다가 문득
그 아들이 전에 부모 속을 썩였던 녀석이라 지나는 투로 안부를 물었다.
"혁인 이제 말썽 안부리고 학교 잘 다녀?"
대답이 없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침 그녀의 핸드폰이 울려 전화를 받느라 대화가 끊겼다.
한참을 옥신각신 통화를 한다.
"내가 그리로 갈께, 어디야?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니?
그러게 내가 직접 간다니깐...
어디냐?
뭐?
순천? 순천 어딘데?
지금 내가 출발 하면 될 거 아냐...
말해 봐..."
또 남편이 바람 피우나 ?
얼마 전에 그 남편이 여자 문제로 속 썩이는 거 같더니...
순천까지 바람 피러 가 들켜버렸나...?
전화가 끊겼나 보다.
그냥 모르는 체하고 계속 서류만 작성하는 나.
또 전화벨이 울린다.
통화가 길어질수록 그녀의 목소리도 강도가 점점 더 세진다.
"에라~이 나쁜 넘아.
그게 나한테 할 소리냐?
돈?
내게 돈이 어디있겠니?
여태 밥도 안 먹고 뭐했니?
네가 집이 없니, 가족이 없니?
지금 그 짓이 대체 뭔 짓이니?"
아마 상대방이 돈을 즉시 보내라며 재촉하는 모양이다.
여관비며 밥값이며 내야한다고 빨리 보내라는데
그녀는 돈이 만원밖에 없다고 본인이 직접 가겠다 하고...
좀처럼 타협이 안되는 통화를 하는 듯하다.
설득인지 화 내는 것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그녀는 흥분하고 있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남편은 아닌 것 같은데...
또 전화가 끊기는가 보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퇴학 당했어.
집 나가서 한 달 만에 처음 온 전화야...
돈 보내라고 계속 전화 하고 있어...
지금 경찰들이 그녀석들 찾으러 다니고 있어..."
혁이가 친구들과 어울려 인터넷 게임 사기를 쳤단다.
여러 군데에서 고발이 들어 와 학교에선 퇴학 처리를 해 버렸고
대체 어디에 있는지 소재 파악조차 못했는데
가출 후 한 달만에 연락이 왔단다.
나와 얘기하는 도중에도 계속 전화가 왔다.
그녀를 협박했다가 화를 냈다가
'오늘이 마지막인 줄 알라'고 에미 마음을 후볐다가,
내 사무실에 있다고 얘길하니,
그럼 내게라도 돈을 빌려서 보내달라고 하는 모양이다.
그녀석은 그런 식으로 엄마의 애간장을 다 녹이다 보면
결국은 엄마가 지고 말거란 걸 아는 거 같다.
한 시간 넘도록 아들과 전화로 옥신각신하는 그녀를 바라보자니
아들만 둘 가진 나로선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싶다.
비록 자고 난 이부자리도 안 개는 게으름뱅이들이지만
엄마 말이라면 무서워 벌벌 하는 우리집 아들넘들을 그나마 이쁘게 봐줘야할런지...
부모 된 것이 무슨 죄가 되길래...
"아무에게도 말 못했어.
자기한테만 오늘 처음 말한거야...어휴...
부모 형제 집 놔두고 저게 뭔 짓인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힘없이 나가는 그녀에게
달리 위로해 줄 말이 떠오르질 않는다.
텔레비죤만 본다고 악 쓰고
게으르다고 쥐어 박고...
우리 애들에게 내가 했던 행동들을 재빨리 떠올려 본다.
"엄마!
이젠 내가 조금만 더 자라면 엄마한테 매도 안 맞을거다.
내가 두 팔로 엄말 꽉 안아버리면 엄만 때리지도 못할거야.
울 생물 선생님이 그러셨어. 중3만 돼봐.
엄마한테 절대 안 맞을거니깐..."
코 식식 불며 투정부리던 중2짜리 둘째넘 얼굴이 어른거린다.
혁이란 녀석도 중2때 바람 들어
고1인 지금까지 못 잡았다는데...
어르신들이 저렇게 몇 년간 부모 애간장을 녹이는 자식들은
이 다음 어른되어 꼭 저같은 자식을 길러 봐야 부모 속 안다고들 하시던데...
이래서 옛 어르신들이 '무자식 상팔자'라고 하셨나보다...
에구...애물단지들...
자식이 상전이란 말이 틀린 말이 아니구만...
자식 이길 부모 없다고 하더니만...
어떻게 해야 부모 노릇을 잘 하는 건지...
정말 착잡한 심정이다.
소년원에 들어가기 전에 빨리 자수시켜야 한다고 걱정하던 그녀의 모습이
영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