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봄.
운향의 집에도 여름이 시작되고 있었다.
운향집 마당에선 여덟살 쯤 보이는 여자아이가 창가를 부르며 놀고 있었다.
김회룡이 물건 떠넘기듯 놓고 간 그 아이는 어느 새 창가도 부르고 춤도 출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마당에서 창가를 부르며 강아지와 장난을 하는 그 아이를 운향의 어머니가 맞장구를 치며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명숙아....... 아바이왔네!”
담 너머 들려오는 어떤 중년 남자의 목소리. 아이는 부르던 창가를 멈추고 얼른 문을 바라보았다.
“아바지?!”
아이는 좋아라 문가로 달려갔다. 그리고 얼른 문을 열어주었다.
김회룡은 하얀 양복을 위 아래로 빼 입고 손에 무언가 잔뜩 들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운향의 노모와 눈이 마주치자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아바지~~~~!”
명숙은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에게 매달려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김회룡은 명숙에게 손에 들고 온 봉지를 건네주었다. 명숙이 받아서 열어보면 보리개떡이다.
개떡을 보고 좋아서 겅중겅중 뛰는 명숙. 김회룡은 명숙을 떼어놓고 안으로 들어섰다.
김회룡은 어쩌다 한번 씩 운향의 집을 찾았다. 그러나 운향 집에서 자라는 명숙에겐 여전히 별 관심 없는 나쁜 아버지. 하지만 명숙은 그런 아버지라도 무척 좋아했다.
어쩌다 한번 운향의 집에 오면 김회룡은 항상 먹을거리를 사왔다. 그건 먹고 사는 것조차 어렵던 그 시절 어린 명숙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뇌물이었다.
명숙은 한번도 아버지의 곁에서 잠들어 본 적이 없었다.
어쩌다 한번 찾아오는 명숙의 아버지는 어린 명숙 곁에서 한번이라도 잠을 잔 적이 없었다. 오히려 명숙이 아버지에게 매달리고 달라붙으면 그럴 때마다 돈을 꺼내주면서 나가놀아라 하던 그런 아버지였다. 어쩌다 잔돈이 없으면 운향의 어머니를 불러 명숙을 부탁하던 그런 남자였다.
그러기를 한 번 두 번..... 일 년 이 년이 지나자 명숙은 의례 아버지 오시는 날은 하루 종일 밖에 나가 노는 날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 오시는 날엔 어머니의 곁에서 잘 수도 없다는 걸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명숙은 세상 모든 아버지들은 다 그런가보다 하고 체념 아닌 체념을 하고 살았다. 어차피 그녀에게 아버지란 아무 의미 없는 존재란 걸 그때 이미 터득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어떤 열 예닐곱 살 먹은 학생이 운향의 집으로 찾아왔다. 명숙은 며칠 전 다녀간 김회룡이 사 준 보리개떡을 들고 마루에 앉아 그 학생을 바라보았다. 보리개떡은 벌써 시큼한 냄새를 풍겼지만 명숙은 아끼고 아껴먹느라 손에 몇 시간씩 들고 있곤 했다.
남학생은 명숙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운향을 찾았다.
“진호야.......”
운향이 그 학생을 집 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학생은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여기 우리 아바지 계신 것 알고 왔시요. 우리 아바지 내 놓으시라요!!”
“진호야, 느 아바지 여기 안 계시다.”
“거짓말 마시라요! 명숙이가 또 군것질 하고 있잖슴네까?! 저거 울 아바지가 사다주싰다는거 지도 압네다!”
명숙은 그 학생이 자신의 이복 오빠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가 김회룡의 소실이라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명숙의 오빠 김진호는 김회룡을 찾아 운향의 집으로 왔다. 그러나 운향의 집에도 김회룡은 없었다. 김진호와 운향은 육감적으로 김회룡에게 또 다른 여자가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김진호는 어린 명숙을 한 번 더 쳐다보다가 밖으로 나갔고 그가 나간 뒤 운향은 툇마루에 털썩 주저앉아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보다 못한 노모가 다가와 운향에게 물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운향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깊은 한숨을 쉬고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당시의 명숙은 어른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느 날 명숙은 거리에서 울면서 들어왔다. 온통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 눈물범벅이 되어 들어온 명숙을 보고 운향이 이유를 물었다. 명숙은 대답대신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내레 아바지에게 가겠시요!! 아덜이 아바지 없는 첩의 자식이라고 놀립네다!!”
운향의 팔에서 기운이 쭉 빠졌다. 명숙은 엉엉 울면서 우물가로 다가갔고 노모는 얼른 명숙의 얼굴을 씻겨주었다. 노모는 명숙에게 그런 소리하는 애들은 나쁜 아이들이라고 어울리지 말라고 타이를 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운향은 철썩 철썩 물로 명숙을 씻기는 소리에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그러던 어떤 여름날이었다.
김회룡이 늦은 저녁에 운향의 집에 헐레벌떡 뛰어왔다. 몇 달만에 온 김회룡. 그는 사색이 다 된 지치고 다급한 얼굴로 명숙을 불렀다.
“내레 누가 아바지 여기 있나고 물어보문....... 아바지 못 봤다고 하라우. 알갔나?”
그는 무척 초조해보였고 겁에 질려 있었다. 명숙은 이유를 몰랐지만 알았다고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김회룡은 운향의 집 다락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리고 온통 그 안에서만 지낼 뿐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낮에도 밤에도 그는 항상 그 안에만 있었다. 어린 명숙의 눈에는 그것이 이상하고 궁금했다. 하지만 명숙은 아버지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고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었기에 어머니에게도 그 이유를 물어볼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
운향은 담 밖에서 들리는 어떤 소리에 부스스 눈을 떴다. 잠시 정신을 가다듬고 유심히 그 소리를 들어보던 운향은 그것이 사람의 소리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운향은 덜컥 가슴이 내려앉는 걸 진정시키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회룡이...... 회룡이........”
“누구십네까?”
“여기 회룡이 없는가?”
“김사장님 여기 안 오신 지 반년도 넘었습네다.”
“그것이 참말인가네?”
“그렇슴네다.”
어린 명숙은 까무룩 잠 든 상태에서 꿈을 꾸는 듯한 기분으로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오마니......?”
명숙은 부스스 일어나 문 밖에 서성거리고 있는 어머니의 그림자에 대고 불렀다.
“아가 깼시요. 날래 가 보시기요.”
잠시 후 운향은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하고 겨우 자리에 앉아있는 명숙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행여 명숙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올까 입을 꼭 틀어막았다. 명숙은 숨이 답답해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어머니는 문 밖 사람들이 멀리 사라지는 걸 다 확인한 후에야 명숙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어느 날, 명숙은 아버지가 자신의 얼굴도 보지 않은 채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는 별로 실망도 낙심도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명숙은 아버지란 사람에게 아무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게 맞을 거다.
그 후 명숙은 며칠 전 밤중에 아버지를 찾아왔던 아버지의 친구가 팔에 붉은 띠를 둘러 맨 채 거리를 걸어 다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많은 지주와 부자들을 잡아갔으며 그에게 잡혀간 사람들은 재판에 회부되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 중 대부분은 죽었다는 소문도 듣게 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