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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고부의 시간


BY 선물 2008-11-24

 

 

지금 이 시간 어머님은 저 쪽 방에 누워계시고 나는 이 쪽 방에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얼마 전 백내장과 망막 수술을 하신 어머님. 퇴원하신 뒤로 되도록 방에 누워계신다.
하지만, 방 안에만 계시기가 몹시 갑갑하신 듯하다.
내가 방문을 여는 소리만 들으시면 바로 거실로 나오셔서 이런 저런 말씀을 건네신다.
나는 어머님 말씀을 들으며 잠시 곁에 머무르다가 금세 다시 내 방으로 들어온다.
내가 들어온 뒤 바깥에 귀 기울이면 어머님도 곧 당신의 방으로 들어가시는 소리가 난다.
어쩌면 어머님이 내게 조금 서운해 하실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루 네 번 어머님 눈에 안약을 넣어 드려야 한다.
어머님 방문을 똑똑 노크하고 들어가서 조심스레 눈꺼풀을 올린 뒤, 발개진 눈 위로 약을 한 두 방울 떨어뜨리고 이불을 목까지 덮어 드린 뒤 방문을 다시 닫아드린다.
봄, 여름, 가을 내내 열려 있던 우리 집 방문들은 겨울이 되면서 굳게 닫힌다.
추위에 유난히 약한 나는 조금의 냉기라도 막기 위해 그렇게 문을 닫는다.
그러나 슬쩍 내면을 들여다보면 방문과 함께 내 맘도 닫히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머님과 나의 관계는 때로 맑고 때로 흐리다.
요즘은 대체로 좋은 편이다.
이럴 때면 나는 평화롭다.
책도 읽고 글도 쓰면서 편안한 시간을 보낸다.
방문까지 닫으니 심적으로 더 여유롭다.
어머님은 내가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것을 싫어하신다.
전기세가 아깝다는 이유에서다.
처음엔 그런 옥죄임이 너무나 견디기 어려웠다.
지금은 적응했다.
평생 그렇게 근검절약하며 아등바등 살아오신 분이시라 도저히 변할 여지가 없으시다.
어머님 그 정신이 지금 이 정도 규모라도 살림을 꾸릴 수 있게 한 원동력이라 생각하면 더더욱 이해해 드려야한다.
다만, 나는 몹시 답답하다.
방문이 열려 있을 때에는 글을 쓰다가 어머님 기척이라도 느껴지면 도둑이 제 발 저리듯 혼자 허둥거린다.
사실 최근에는 내가 컴퓨터 앞에 있는 것을 드러내놓고 뭐라 하시진 않는다.
그래도 한 번 뇌리에 박혀 있는 일로부터 쉽게 자유로워지질 못한다.
나는 주눅 든 며느리다.

어머님 몸이 많이 불편해지면서 마음과는 달리 집안일도 거의 다 손 놓게 되셨다.
그 후로는 나는 산송장이다, 오래 살아 너희 힘들게 한다 그런 말씀을 자주 하신다.
얼마 전부터 어머님 목욕하시게 되면 때도 밀어드리고 곁에서 이런저런 수발을 해 드린다. 그래도 되도록이면 당신 혼자서 하실 수 있는 일은 손수 하시려고 무지 노력하고 계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눈 수술 하신 뒤로는 머리를 감겨 드려야 하는데 눈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과정이 몹시 힘들고 신경이 쓰였다.
어머님 또 그런 말씀을 하신다.
에고, 미안하네. 내가 늙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냐, 참 한심한 몸이다. 네가 고생이다.
이런 때의 어머님은 주눅 든 시어머님이시다.

그럴 때면 나는 그저 흘러가는 말처럼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여태껏 그렇게 어머님 몸 고생 시키셨으니 이제 몸이 호강을 하셔야지요.
저는 안 늙나요, 뭐.
어머님 표정을 읽노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셨음이 느껴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어머님 곁에 많은 시간 머무르는 며느리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되도록 어머님과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줄이려고 애쓴다.
이상하게 어머님과 대화를 하다보면 내 맘이 상처를 받게 된다.
그러면 어머님이 미워진다.
우리 어머님 나쁘신 분은 절대 아니다.
그런데 자식을 아끼는 맘이 정말 대단하시다. 하늘이 내린 장한 어머니시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쳐서 자식 미워할 일이 생기면 그 화살을 며느리에게 돌리고 싶어 하신다. 그래서 대화중에 서운한 일이 생각나면 바로 나를 탓하시게 된다.
그 부당함이 싫어도 좋게 이해 해 드리려고 했는데 나도 나이 들다 보니 무조건 순하기만 하던 맘이 사라지고 속으로 삭이던 조심스러움도 잃어간다.
나는 누군가를 미워하는 나를 보는 것이 참 싫다.
그래서 미워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사람이 원망스럽다.
남편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는 어머님.
사각의 시멘트 속에서 하루 24시간을 함께 하는 어머님.
미움의 눈을 가지면 바로 지옥이다.
미움을 만들 싹부터 줄여야 한다.
내가 어머님과의 긴 대화를 꺼리는 이유이다.
옛날 너무 생각이 없었다.
하루 종일 어머님 곁에 있어야 하는 줄 알았다.
어머님이 가서 쉬어라 하셔야 가도 되는 줄 알았다.
그것은 몸과 마음 모두 참으로 피곤한 일이었다.
그러나 내가 자처한 시집살이요, 서로를 잘못 길들이게 한 실수였다.
그렇게 살아왔기에 최근의 내가 어머님께는 서운하실 수도 있다.
하지만, 확실히 상처 받는 일은 줄어들었고 어머님을 보는 내 눈 속 미움도 옅어졌다.

대신 어머님은 방에서 여기저기 전화를 하시는 시간이 늘어났다.
정액제를 하신 뒤로는 전화기가 보물이다.
당신 외롭다는 말씀을 자주 하시는 것 같다.
외로움은 누가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리라.
내가 하루 종일 곁에서 재잘거린다 한들 덜 외로우실 수는 없다.
나 또한 방에 박혀 있는 동안의 마음이 결코 태평하지 못하다.
어머님 문소리가 나면 냉큼 나가서 뭐 찾으시는지 여쭙고 한다.
그 정도만으로도 어머님 만족하시려고 애쓰시는 것 같다.
나에 대한 서운함과는 별도로 나를 많이 배려하고 싶어 하신다.
틈틈이 사탕도 주시고 땅콩도 내미신다.
형님들이 어머님 두고두고 드시라고 드린 고급 간식들이다.
그런 것 절대 당신 입에 넣지 못하시던 분인데 얼마 전부터 정말 따로 두고 드시곤 한다.
물론 아주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요즘엔 어머님도 어머님이 불쌍하신 가 보다.
나도 어머님 가여우시다.
희생만 하신 어머님.
내가 어머님을 가엾게 생각할 수 있는 요즘이 좋다.
또 다시 어딘가로 당신의 화를 터뜨려야 할 때가 오면 나는 가여운 맘이 없어지고 평화도 잃게 될 테니까.
모쪼록 지금 이 시간 가진 마음이 계속될 수 있기를...
어머님 미워하는 못난 나를 보지 않게 되기를...
슬픈 고부의 시간은 이렇게 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