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가 갔다.
방학을 끝내고 언제나처럼 총총히 갔다.
트렁크 하나 끌고 어깨에 메는 가방 하나 들고 고속버스를 향했다.
볼륨매직으로 동그랗게 부푼 뒷머리가 귀여웠다.
큼직한 엉덩이와 튼실한 허벅지도 사랑스러웠다.
담양의 학교 기숙사로 향하는 아이의 얼굴은 밝고 건강했다.
지금 고 3인 내 딸.
중 2때 닥친 사춘기의 후유증으로 엄청난 아픔을 주었던 그 아이가 벌써 고3
이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암흑 속에서 허둥대던 눈물의 시간들.
그 농도는 차차 옅어졌으나 그래도 지난겨울까지는 분명 가슴 속 묵직한 아픔
이 내내 걸려 있었다.
그리고 이번 여름 방학.
나는 그 돌덩이 같은 아픔을 던져내게 되었다.
참으로 오랜 세월 맛보지 못한 평화였다.
아이는 매일매일 예뻤다.
시간시간 빛났다.
여느 집의 여느 딸들이었으면 그저 평범한 일상일 뿐인 모습들이었겠지만
내 딸아이였기에 그렇게 대견하고 고마울 수가 없었다.
이제 더는 딸아이가 아픔으로만 보이지 않기에 지난날을 돌아보는 것도 덜 먹
먹하다.
처음 필사적인 아이의 등교거부와 그를 용납할 수 없었던 가족과의 마찰이 시
작이었다.
학교 건물만 봐도 비명을 지르던 아이는 끝내 등교를 강요하는 부모를 피해
가출까지 시도했다.
다행히 아이가 하룻밤 지낸 곳은 친구 집이었지만 우리는 뜬 눈으로 지옥 같
은 밤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알았다.
그저 성장과정 속의 한 고비로만 넘길 수 있는 단순한 일이 아닌 거대한 고난
이 우리의 인생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어쨌든 학업을 중단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했다.
여름날 아이와 함께 학교 가고 하교할 때까지 뜨거운 운동장에서 아이를 기다
려 함께 집으로 왔다.
가슴이 답답하다 하면 학교에 체험학습 신청을 낸 뒤, 동해로, 설악으로, 경주
로, 부산으로 함께 다녔다.
혹시 병적인 문제인가 싶어 없는 형편에 턱없이 비싼 돈 내며 병원에서 하라
는 온갖 검사며 상담들을 다 받았다.
그런데도 나아질 기미는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선택하게 된 것이 대안학교.
자동차로 다섯 시간 거리나 되는 곳에 어린 딸아이를 두고 올 때 흘렸던 것은
눈물이 아니었다.
애간장이 끊어지는 아픔이란 게 무엇인지 알게 해 준 시간들이었다.
대안 중학교를 마치고 지금의 대안 고등학교까지 우리는 5년을 떨어져 지냈
다.
지난겨울까지 아이가 무사히 학업만 마쳤으면 하는 것이 소망이었다.
중간 중간에 전학 시켜달라고 고집 부리는 아이를 달래는 것도 여간 힘든 일
이 아니었다.
이제는 나도 사고방식이 많이 변했지만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내게 아이는 참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두 달 정도에 한 번씩 만나게 되는 아이는 머리 염색, 귀걸이, 매니큐어, 칼라
렌즈, 피어싱 등 늘 내 눈에 거슬리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피어싱한 모습에 내가 질겁하자 그건 바로 뺐지만 다른 것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반복되자 언제부턴가 마음이 담담해지기 시작했다.
어쩜 그것이 포기하는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방학을 맞아 집에 오면 언제나 공부는 뒷전이고 늦잠 자고 컴퓨터 하고 친구
만나 영화 보고 그렇게 시간을 허비했다.
만약 아이에게 어떤 기대가 있었다면 내 속은 불지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화가 나고 기막히기만 했을 뿐 곧 그러려니 하는 반 포기하
는 마음으로 마음을 누그렸다.
그런데 겨울 방학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간 아이가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를 할
때 조금 달라지는 느낌을 갖게 했다.
우선 놀라게 했던 것이 핸드폰 요금을 가장 저렴한 요금제로 바꿔달라는 것이
었다.
그동안 아이는 늘 핸드폰 요금으로 우리를 속상하게 했다.
정지 시킨 적도 있었지만 달라지지 않았고 늘 우리를 실망시켰다.
그랬던 아이가 먼저 그런 제안을 해오니 어리둥절했다.
게다가 용돈까지 줄이겠다고 했다.
내가 확실하게 느낀 변화는 그것이 처음이었다.
다음은 새벽 1시를 넘어서 보내는 아이의 문자였다.
-엄마, 나 오늘 지금까지 열심히 공부했어, 착하지? 잘 자. 사랑해 엄마.
-엄마 선생님들이 나 예쁘대. 약속 잘 지킨다고.
-엄마, 아빠, 보고 싶어요. 너무 보고 싶어 눈물이 나요.
그리고 방학이 되어 집으로 온 아이의 모습은 정말 달라져 있었다.
동그란 바가지 머리에 단정한 모습. 그리고 살도 제법 빠져 있었다.
학교에서 보낸 통지문에는 여태껏 볼 수 없었던 선생님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너무 예쁘고 밝아진데다 기숙사 생활도 모범적으로 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공부도 열심히 한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너무 오래 공부를 놓았던 아이라 갑자기 없던 기대를 하기엔
무리가 있어보였다.
그런데 정말 아이는 모습만 바뀐 것이 아니었다.
성격도 굉장히 유순해지고 부모 생각하는 맘도 보통 깊어진 것이 아니었다.
물론 여전히 순간순간 감정절제가 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예전처럼 뚱하지 않고 금세 방긋 웃으며 사과하고 분위기를 좋게 만들
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아직 사춘기를 겪느라 부모 속상하게 하는 제 남동생을 보면서 우리를
위로하려고도 한다.
자기도 이제야 좀 철드는 것 같은데 동생도 그렇게 될 테니까 참고 기다려 달
라고 한다.
동생에게도 부모님 마음 아프지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 영향인지 누나가 학교로 간지 5일째, 아들은 잘 생활하고 있다.
딸아인 방학을 맞아 담임선생님께 편지를 썼다고 했다.
1학년 때 선생님께는 자기가 전학가려고 할 때 끝까지 말려주신 것에 대한 감
사의 마음을,
2학년 때 선생님께도 이런 저런 감사의 마음을,
그리고 지금 담임선생님께는 신뢰와 존경의 마음을 전해드리고 싶었다고 한
다.
아이가 선생님을 좋아한다는 것은 부모로서 참 감사한 일이다.
남편은 이번 방학이 끝나갈 무렵 몹시 울적해했다.
추석 때 집에 오니까 겨우 20여일 떨어져 있는 건데도 마음이 그게 아닌가 보
았다.
사실 딸아이에겐 엄마보다 아빠가 더 감사한 존재이다.
어떤 일로 실망을 주어도 언제나 남편은 딸아이에 대한 신뢰와 기대를 저버리
지 않았던 사람이다.
내가 보기엔 어림없어 보이는 일도 남편은 우리 딸이라면 언젠가는 반드시 해
낼 거라고 격려하였다.
딸아이도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아빠에 대해 무한한 고마움
을 갖고 있고 어릴 때부터 유난히 자신을 예뻐해 준 아빠를 애틋해하고 있다.
그런 부녀지정을 보는 내 맘도 감사 그 자체이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일로 내가 이렇게 떠들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동안 너무나 배가 고파 있었다.
늘 배부른 사람은 고급 스테이크를 줘도 그렇게 달게 먹을 줄 모른다.
나는 이런 평범함이 몹시 목말랐기에 이토록 호들갑스러울 만큼 달디 달게 먹
는다.
자식 둔 사람은 절대 큰소리 쳐서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지만 잠시는 이 맛을 즐
기고 싶다.
언젠가 딸에게 그랬다.
너에 대한 책을 쓰고 싶다고.
네가 잘 되면 네 지난날이 빛날 수가 있다고.
힘든 시기를 겪는 아이나 부모에게 작은 희망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이번에 딸이 그런다.
외가댁에도 다른 친척들에게도 자기 착해졌다고 자랑하란다.
그동안 미운 모습만 알고 계실 테니까 이제 달라진 것도 아시게 해 달라고.
앞으로는 열심히 살겠다고 한다.
꿈도 있고 자기의 가능성을 스스로 믿는다고 했다.
여태껏 걸어왔던 길이 지금 생각하면 기막히게 창피한 일이지만 자신은 이상
하게 그 길이 더 잘 되려고 계획되었던 일처럼 생각된다는 말도 했다.
나는 동화를 믿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도 우리 아이에게 동화처럼 놀라운 미래를 기대하진 않는다.
그래도 이미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대학에 가든, 제 바람대로 유학을 가든.
아니면 뜻대로 잘 안되더라도 지금 같은 마음가짐만 있다면 딸아이의 미래는
얼마든지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다.
실제로 이번 방학에는 내내 아이가 책상에만 앉아 있었다.
신기할 정도였다.
물론 결과가 좋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지만 그보다는 우선 목표를 향해 무언
가를 능동적으로 한다는 것 자체가 더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지금은 딸아이의 두 개씩 매달린 귀걸이도, 곱게 칠한 매니큐어도 내 눈에는
예쁘게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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