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병이 따로 없다. 요즘 내 모습을 보노라면 영락없는 상사병 환자이다. 혹시라도 전화가 오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맘에 두근두근 가슴은 방망이질하고 보고싶은 그리움은 주체못할 눈물을 부른다. 그런 때면 한끼 밥조차 먹기 힘들만큼 목이 메인다. 누군가를 이토록 아픈 가슴으로 사랑했던 기억은 일찍이 없다.
그러나 지금 내가 앓고 있는 이 병에 대해 탓하는 사람은 없다. 아니, 오히려 함께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여준다. 엄마라는 이름을 가졌기에 더 많은 아픔을 겪어야 하는 여인들은 더욱 그러하다. 상사의 병을 앓게 한 대상이 바로 자식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언제나 여린 꽃잎 같은 딸아이인지라 그 애틋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더 깊고 짙다.
아이는 내게 예쁜 꽃잎이었다. 나는 그 여린 꽃잎이 다칠까 전전긍긍하며 튼튼한 울타리가 되어주고자 했다. 꽃은 울타리 속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고 편안해 보였다. 하지만, 정작 아이는 그렇게 느끼지를 못했던 것 같다. 엄마가 만들어 놓은 울타리를 그물로 생각한 듯 빠져나가려 발버둥쳤고 그럴수록 불안해진 나는 더 단단한 올가미로 옥죄려 했다.
한창 싱그러운 여중 2년 생인 딸아이가 처음 등교를 거부한 것은 봄이 찬란하게 무르익어 가던 4월 끝자락 어느 날이었다. 멀쩡하게 수학여행 준비를 하던 아이가 여행 하루 전날 갑자기 여행을 가지 않겠노라 고집을 부리는 것이었다. 그저 단순한 투정이려니 생각했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의 시초였던 지를 깨닫게 되었다. 아이는 타고 갈 버스의 자리배정에서 외톨이가 된 것이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와의 다툼이 있은 바로 뒤인지라 자기 옆자리에 앉을 친구를 미처 구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그것이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던지 여행 떠나기 전날 밤 아이의 이불은 눈물로 흥건히 젖고 말았다.
어떻게 보면 아주 작고 사소한 일일 수도 있으나 정작 내 아이는 그렇게 의연한 마음으로 대처해 낼 힘을 갖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일을 발단으로 명랑하고 즐겁게 학교생활을 하던 아이는 차차 말수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학교를 엄청난 두려움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차를 태워 학교 앞까지 데려다주어도 교문만 보면 소리를 질러댔고 나는 나대로 너무나 난감한 마음이 되어 악다구니를 치게 되었다. 학교를 가지 않는 것. 그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기에 마치 전투를 치르는 작전 병처럼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아이의 등교를 독려했고 때론 협박까지 불사하며 아이의 등을 떠밀었다. 교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학교가 지옥처럼 느껴져 숨이 막힌다며 눈물범벅 되어 호소하는 것을 억지로 떠밀어 넣은 뒤 나는 운동장 구석에 차를 세워둔 채 하교시간까지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고통의 시간은 몇 달간 계속되었고 우리는 지칠 대로 지쳐가고 있었다. 아이에게는 학교라는 거대한 한 축이 무너지자 또 다른 삶에 대한 의욕까지 도미노현상처럼 줄줄이 무너져갔다. 분노만이 가득한 눈으로 세상을 원망했고 그런 자신을 제대로 이해해주지 못하는 엄마를 야속해하며 철저히 혼자가 되려했다. 완전히 마음을 닫아버린 아이. 아이의 입에서는 싫어, 안 해, 못 해라는 말만 흘러나왔고 순간순간 내 눈에도 아이가 원수처럼 보이며 미워지기 시작했다. 아이를 위해 할 수 있을 만큼의 사랑을 다 주었는데 도대체 무슨 불만이 있어 이런 고통을 겪게 하는 것인지, 다른 아이들은 아무 말 없이 잘 다니는 학교를 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그 심보가 너무도 서운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은 부모가 너무 약한 모습을 보여 아이가 마음을 못 잡는 것이라며 보다 단호한 모습을 보여 학교에 마음 붙이도록 해 달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단호해지면 질수록 아이는 퉁기듯 더 먼 곳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도대체 무엇부터 잘못된 것인지, 단 한 번의 결석 없이 착실하게 학업생활을 하던 딸아이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나는 하늘이 원망되고 세상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항상 내 탓이오 함으로써 평화를 얻었던 내 마음에 드디어 원망과 분노, 적대심이라는 씨앗이 뿌려졌고 아이의 눈물은 나를 자극하며 양분이 되어 그 씨앗을 무럭무럭 자라게 만들었다. 그 나이 또래에 작은 다툼들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겠지만 아이가 저토록 심한 상처를 입고 아파할 때는 그 이상의 어떤 문제들이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이의 친구들조차 미워지고 원망은 주변의 모든 것들을 향해 뻗쳐가고 있었다. 유난히 더웠던 올 여름. 그가 벌컥 게워내는 잔인한 열기를 운동장에서 온 몸으로 고스란히 받아낸 나는 때때로 광기 어린 웃음마저 흘려가며 내 삶을 난도질하고 싶은 충동까지 느껴야 했다.
아이는 시급한 맘으로 전학을 원했다. 다니던 학교를 벗어나기만 하면 족할 그런 단순한 전학. 그러나 우리의 고민은 그렇게 단순할 수가 없었다. 아주 작은 일에도 그렇게 쉬이 무너지는 나약함으로 대체 어디서 견뎌낼 수 있을지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열 다섯 살이 되도록 자신의 스타킹 한 번 빤 적이 없고 설거지 한 번 제대로 한 적이 없는 아이. 조금이라도 힘든 일이 생기면 어쩔 줄 몰라하며 엄마를 부르는 아이. 어쩌자고 나는 아이를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바보로 키우고 있었단 말인가.
일이 터지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이 아이를 보다 강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남편은 예전부터 관심 있게 지켜 본 대안학교를 생각해냈다. 하지만, 어수룩하기만한 아이를 혼자 떠나보낼 자신이 없던 나는 망설임 속에서 연신 흔들리고 있었다. 인생의 길을 걷다가 만나게 된 갈래 길 앞에서 보다 익숙한 길을 택하고 싶은 마음이 자꾸 앞선 까닭이다. 하지만, 아이는 의외로 다니던 학교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해방감 때문인지 혼자 떨어진다는 것에 대한 고민이 별로 없어 보였다. 쉽진 않지만 생각의 중심을 나로부터 아이에게로 옮겨보기로 마음먹었다. 낯선 길이라 하여 길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저 잘못되고 비틀어진 길로 가지 않도록 안내하는 정도가 내 몫일 것 같았다.
우리는 아이에게 적합한 학교를 찾기 위해 예닐곱 시간씩 걸리는 곳을 몇 번씩이나 찾아다녀야 했다. 다행히 마음에 꼭 드는 학교를 찾기는 했으나 전학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결원이 있어야 하는데 그 자리는 극소수에 불과했고 전학을 원하는 아이는 그보다 몇 곱절 더 많았던 것이다. 필요한 서류를 내고 면접을 치른 뒤 애타는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리던 중 다행히도 아이의 합격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뜻 밖에도 편안해지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길을 잃고 헤매다가 이른 곳이 막다른 길이 아닌, 정말 내 아이에게 꼭 필요한 것을 가르쳐줄 수 있는 고마운 길이란 생각이 든 것이다.
녹차 밭이 가까운 평화로운 시골, 깔끔한 기숙사가 있는 작은 학교. 선입견으로 갖고 있던 아이들 모습과는 달리 너무나 예쁘고 순수해 보이는 좋은 친구들. 세상을 향했던 원망의 마음은 조금씩 거둬들여졌고 나는 희망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자연과 벗하며 살아가는 시간동안은 아이의 영혼도 절로 맑아질 것이고 무엇보다 나약했던 예전 모습과는 다른, 스스로를 찾아내는 단단한 아이가 되어 주리란 기대를 갖게 된 것이다.
돌아보면 자라나는 과정에서 아이의 마음이 늘 평화롭지는 못했으리란 생각이 든다. 처음 딸아이가 태어났을 때 모두가 한마음으로 축복해주긴 하였으나 내 맘 한 구석에는 아쉬움이 깃들여있었다. 남편이 위로 누님만 네 분 있는 3대 독자 귀한 아들이었기에, 누구하나 특별히 부담주거나 내색하지 않았건만 나는 임신 내내 아들에 대한 강박관념에 짓눌려야 했다. 그리고 결혼으로 인해 맺어진 새로운 관계들과의 적응과정에서 처음으로 여자라는 것에 대해 상처받기 시작했고 늘 불안한 마음이 되어 어두워져갔다. 엄마의 기운은 아이에게 그대로 스며든다는데 비록 아무 것도 모르는 갓난아기였을망정 그 슬픔의 기운은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또한, 조부모 님과 함께 삼대가 살아가는 집안에서 보다 풍성한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들의 70여 년 이상 살아오시면서 박제된 고정관념으로 인해 신세대 딸아이는 억울함도 많이 느껴야만 했다. 4대 독자 남동생과의 관계에서도 늘 누나라는 명분으로 강요된, 그러나 사실상 여자이기 때문에 당해야 했던 크고 작은 차별들이 한참 뻗어나갈 딸아이의 기를 조금씩 누그러뜨리기도 했을 것이다. 세상은 점점 여자에게 더 큰 것을 기대하며 문을 열어주는데 내 아이는 오히려 작아져가고만 있었으니 그것은 엄마인 내가 가운데서 중심을 제대로 잡아주지 못했던 까닭이다. 그러면서도 아이의 나약함만 탓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다.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엄마가 되는 길은 단 하나, 아이를 놓아주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을 속으로 삼키는 일이다. 사랑은 마음대로 퍼붓기보다 그렇게 참아내기가 훨씬 고통스럽다. 그러나 고통을 이겨내야 아이에게 세상을 살아갈 힘을 갖게 해 줄 수 있음을 어찌하랴.
아이는 그 곳에서 힘들 때마다 전화를 한다. 때로는 통곡하듯 운다. 그러나 그 울음에 또 다시 흔들리는 엄마가 될 수는 없다. 내가 먼저 단단해지지 않고서 아이에게 그것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부모 밑에 있을 때와는 달리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는 충분히 알고도 남음이 있다. 더구나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한번 다쳤던 마음이라 새로운 환경에의 적응도 몹시 어려울 것이다. 누군가 조금만 강하게 나와도 아이는 뒷걸음질하며 도망가고싶어한다. 하지만, 아이가 배우러 간 것이 바로 그것이다. 힘이 들어도 스스로 이겨내고 그런 자신을 인정하고 우뚝 서는 것. 바로 그것을 배우러 간 것이다.
때문에 나는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던 딸아이의 전화를 받기가 두렵다. 다른 가족들과는 밝은 목소리로 통화하다가도 내 목소리만 들으면 약해져서 목이 잠긴 채 말을 잇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더 두려운 것은 아이의 우는 소리를 듣는 것보다 내가 참지 못하고 무너지듯 울음을 터뜨려 그 소리를 아이가 듣게 되는 일이다. 엄마와 딸은 그런 것일까, 서로 눈물나게 하고 가슴 시리게 만드는 그런 색깔을 지닌 존재들일까... 하긴, 나 또한 입을 모아 엄마라고 불러보면 지금도 금세 몽글몽글 까닭 모를 슬픔이 차 오르는 것을...
하지만, 지금 삼키는 이 눈물이 내 안에서 강을 이룬다 해도 마음이 마냥 어둡지만은 않다. 언젠가는 그 강 위를 힘찬 날개 짓하며 돌아올, 아이에 대한 찬란한 꿈이 있기에... 그리고 이미 그 꿈을 향해 내딛는 딸아이의 발걸음을 볼 수 있었기에...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졌던 아픈 시련은... 고맙게도 우리를 키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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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아이는 방학을 맞아 집으로 와서 달디 단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이가 옆에 함께 있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일이란 것을 정말 예전엔 미처 몰랐지요.
모두들 즐거운 연말연시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