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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이름의 꽃


BY 선물 2004-09-17

가까운 분 중에 꽃을 무척 좋아하는 분이 계시다. 그 분의 베란다는 언제나 꽃향기로 그득하다. 초록과 어울린 화려한 색깔의 꽃들은 길다란 사각의 베란다를 마치 고운 물감 흩뿌려놓은 도화지처럼 아름답게 수놓는다. 거실에서 베란다를 보고 있던 내 눈길은 홀린 듯 어느 새 발길까지 끌고 나를 그 곳으로 데려간다. "아, 정말 예쁘네요." 절로 탄복하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금세 당황하고 만다. 정말 많이 보아왔던 꽃들인데도 정확한 이름을 아는 꽃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부끄러움에 조금은 민망해진다. 그러던 차에 참으로 반가운 꽃 하나가 도드라진 모습으로 눈에 확 하니 들어왔다. 어릴 때 집 앞 화단에도 흐드러지게 피어났던 분꽃이 눈에 띈 것이다. 진분홍색과 하얀 색의 꽃들이 한데 어울려 만개해 있는 모습이 정말 오랜 친구에게 보내는 환한 웃음처럼 살갑게 다가왔다. 익숙한 꽃들이 더 많았다면 비록 남의 화단이었을망정 그 곳에서 제법 오래도록 푸근한 시간을 즐겼을 것이다. 하지만, 울긋불긋 빼어난 자태를 뽐내고 있던 다른 꽃들도 자신들의 이름이 불리어지기를 간청하는 것 같아 차마 그 곳에 더 머무를 수가 없었다. 괜스레 미안한 맘이 된 나는 발개진 얼굴로 황급히 그 곳을 빠져나왔다.

사실 꽃에 관한 한은 조금 죄스러운 마음이 생겨난다. 어릴 때 무심코 들여다 본 꽃에서 무섭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 때문이다. 어린 나에겐 아마 무섭다기보다는 징그럽다는 느낌이 우선이었을 것이다. 어떤 꽃을 보며 그런 생각을 가졌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꽃이었든 그런 불경한 생각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모든 꽃들 앞에서 언제나 죄인이 된 느낌이다. 어쩌면 너무도 화려한 색의 질서 정연한 아름다움을 보며 지레 질렸던 탓이 아닐까 그렇게 변명해보기도 한다. 어쨌든 그 후로는 꽃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기를 주저하게 되었고 그 때문에 아주 유명한 몇 몇 꽃을 제외하고는 정확한 이름을 아는 꽃이 거의 없는 형편이 되었다. 더군다나 도시에서 태어나고 도시를 떠나 살아본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자연과 마음을 더불어 할 기회가 적었고 꽃에 눈길 줄 기회 또한 별로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세월과 함께 꽃을 향한 내 마음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어느 때부터인가 자연의 아름다움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예전에는 어떤 공간을 메우기 위한 한낱 조형물이나 도구처럼 미약한 존재에 불과했을 나무나 풀, 꽃들이 저마다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지닌 채 새로운 의미가 되어 내 품에 감겨 들어왔다. 꽃을 보고도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은 그 마음에 악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누군가로부터 들은 기억이 있는데 전부는 아닐망정 조금은 그 말에 고개 끄덕여지며 수긍하는 맘이 된 것이다.

그런 변화는 어떤 면으로든 나를 넉넉하게 만들어주었다. 앞만 보고 재촉하던 발걸음도 조금씩 늦춰지기 시작했다. 혼자서 쓸쓸한 마음으로 길을 걷다가도 맑은 기운이 느껴져 고개를 돌려보면 그 자리엔 역시나 올망졸망 귀한 생명들이 훈기를 내뿜고 있었다. 얼마나 앙증맞은 모습인지 그들에게 눈을 맞추는 동안 자꾸 행복해졌다. 그러자 갑자기 지독한 갈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바로 이름에 대한 갈증이었다. 나무도 그냥 나무가 아닌 그만의 고유한 이름이 있을 터였고 풀잎들도 저마다의 고운 이름이 분명 있을 것이었다. 더구나 꽃의 향긋한 미소를 대하면서 조차 그저 꽃이라고 밖에는 달리 부를 수 있는 이름을 알지 못함이 여간 아쉽고 서운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길거리에 한가로이 피어난 꽃들을 들여다보며 나는 드디어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꽃 이름을 묻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아름다움을 자상한 눈길로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지가 않았다. 정말 지천으로 흔하게 널려 있는 꽃들인데도 그 꽃의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귀하기만 했다. 물론 나 또한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었으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보면 길을 걷다가 들판에 피어난 꽃을 보며 그 이름들을 줄줄이 꿰어차던 사람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따스한 사람들인지 조금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참으로 부러워졌다.

물론 이름을 모른다 하여 사랑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정말 사랑스러운 꽃들 중에도 이름 없는 꽃들이 많음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 경험으로는 이름을 알게 되면 그들과 조금은 더 가까워짐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욕심내지 않고 차근차근 꽃들과 친해지려 애썼다. 그렇게 해서 이름을 알게된 꽃들은 정말 희한하게도 그만큼 친해져가고 있었다. 이른 봄날 들판에 피어나는 연보라 빛 봄까치풀, 하얀 이파리가 아기 콧망울처럼 귀여운 노루귀, 새색시 발그레한 뺨을 닮은 수줍은 홍매화, 샛노란 수선화 등 그들만의 귀한 이름을 하나씩 알아 가는 재미란 여간 쏠쏠한 것이 아니었다. 이름을 안다는 것, 그것은 단순하게 부를 수 있다는 의미 이상의 보다 특별한 그들과의 교감을 갖게 해 주는 역할을 했다. 이름을 부르면 생명에 대한 경외심으로 그들을 보게 된다. 오도카니 무생물처럼 앉아있던 꽃들은 발그레 화색이 돌며 새롭게 피어나는 듯하다. 마치 요정의 손길이 닿은 곳마다 톡톡 물방울이 터지며 그 모습을 드러내는 생명체처럼 신비로운 느낌. 그런 느낌을 갖는 날은 희한하게도 하루가 즐거워진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다정해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즐거워진 그 마음은 오롯이 주위 사람들을 향한 관심과 사랑으로 전이된다. 사실 꽃과 나무가 아무리 아름답다한들 어찌 사람에 비할 것인가. 사랑하는 마음, 그것은 결코 꽃과 사람이 따로 구별되지 않을 것이다.

이름을 알고 싶어한다는 것은 어쩌면 작은 관심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작은 관심이 애정을 갖게 만들고 또 사랑을 확산시키는 단단한 힘을 키워주는 것이다. 사랑의 마음으로 꽃들과 눈을 맞추는 사람들. 꽃들의 눈에는 어쩜 그들이 꽃으로 보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꽃이 된 사람들은 세상을 향긋하게 해 주고 화사하게 밝혀줄 것이다. 가끔은 꽃이 되어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도 행복이리라. 실제로 꽃을 무척 좋아한다는 분은 어디서든 풀잎 하나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더니 네 잎 크로바를 한 바구니 양만큼이나 찾아내서 갖고 계신다. 그것을 소녀처럼 하나하나 코팅 처리하여 지인 들을 만나면 아낌없이 나누어주는데 정말 행운을 전파하는 전령사 마냥 그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워 보였다. 진정으로 사랑을 확산시키는 힘을 가진 분이다.

 오늘도 나는 길을 나설 것이다. 길에서 만나는 살랑거리는 바람과도 인사할 것이고 운 좋게 이름을 아는 꽃이라도 만나게 되면 반갑게 웃는 낯으로 눈빛을 교환할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동안 무심한 마음으로 지나쳤을 주위의 사람들에게 환한 미소를 건네고싶은 마음이다. 안면이 있으면서도 서로 겸연쩍음에 주춤거리며 먼저 인사 건넬 기회를 놓친 사람들. 그들에게 용기를 내어 손 내밀고 싶어진다. 꽃의 이름을 알고자 지나가는 사람의 도움을 청할 정도의 용기라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생글거리는 눈으로 먼저 건네는 인사는 예쁜 꽃 한 송이 피워 낼 씨앗이 될 것이다. 아무리 척박한 땅이라 할지라도 사랑이라는 아주 근사한 이름의 꽃을 거뜬히 피워 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