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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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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


BY 선물 2004-08-27

 

참 예쁜 토끼를 보았었다. 어떤 손길도 닿지 않은, 소복하게 쌓인 그대로의 탐스런 눈을 닮았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시루 속의 뽀얀 백설기를 닮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눈부셨던 순백의 갓난 토끼를 보며 차마 눈길주기조차 두려웠던 것은 내 눈길이 토끼에게 독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말 그 때 그렇게 느꼈었다. 

토끼의 주인은 이웃집 아이였다. 꼬물거리는 작은 토끼를 바라보던 아이의 황홀해 하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토끼는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는 그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게 되었다. 작고 예쁘고 그래서 무척 사랑스러웠던 토끼는 아이의 사랑이 독이 되어 죽고 만 것이다. 이제 갓 세상을 만나 힘겹게 적응하려던 토끼에게 아이의 지대한 관심은 오히려 큰짐이 되었던 모양이다. 아이의 눈길이, 그 손길이 사랑인지를 채 깨닫기도 전에 토끼는 먼저 아이를 떠나버렸다. 아이가 준 것은 사랑이었으나 토끼가 받은 것은 독이었다.

처음 토끼를 살 때 자꾸 만지면 손독이 올라 어린 토끼에겐 좋지 않으니 조심하라는 말을 아이는 분명 들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토끼에게 주는 내 짧은 눈길조차 아이는 겁을 내며 제지했을 테지. 하지만, 정작 본인은 넘쳐흐르는 토끼에의 사랑을 절제하지 못했다. 하고 싶은 대로 안아주고 원 없이 만지작거렸다. 그저 토끼가 편안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고요하게 지켜볼 수만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토끼를 허무하게 떠나 보내지 않았으련만...

처음 아이를 낳고  내 품에 안았을 때 초점도 맞추지 못하는 작고 까만 눈동자가 너무나 황홀하게 느껴졌다. 아이는 내게 참으로 감사한 선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원 없이 아이를 사랑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아이를 섬겼다. 힘든 줄을 몰랐다. 왜냐하면 그게 내 사랑 법이었고 사랑은 노력하지 않아도 절로 샘솟았기 때문이다. 아니, 정작 노력해야 했던 것은 오히려 사랑을 절제하여야 하는 일이었다. 넘쳐흐르는 대로 다 쏟아 붓는 것은 어쩜 상대를 위한 사랑이 아닌, 내 만족을 위한 자기애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랑을 하면서 그만큼 아팠던 것은 아이라는 존재의 진실은 내게 기쁨과 즐거움만을 선사하는 그런 선물이 아니라는데 있었다. 처음부터 그것을 잘 알만큼 지혜로웠다면 적어도 독인줄도 모른 채 집착 같은 사랑을 마구 퍼붓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 사랑에 반짝이며 답하지 않는다 하여 눈물 떨구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새끼에게 혼자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친 뒤 둥지를 떠나게 하는 어미새의 지혜보다 더 못한 내 사랑 법은 그래서 아이도 나도 몹시 힘들게 했나보다. '내 것`인줄로만 알았던 아이를 힘껏 날게 하고자 내 깜냥대로 노력했던 것이 날기는커녕 겨우 커다란 애드벌룬 속에 가둔 채 먼 창공에 띄워놓고 아주 단단한 동아줄로 묶어놓은 형상이 되고 말았다. 그 속에서 아이는 결국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거죽을 찢고 뛰쳐나온 것이다. 놀란 나는 기겁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했고 한동안 우리는 암흑 같은 끔찍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 강인한 힘을 가르치지 못한 대가치곤 제법 혹독했지만 한편으론 그로 말미암아 아이와 내가 단단해지기도 했다. 부모 곁에서 한없이 나약해지는 딸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결심은 그래서 그 단단함으로 인해 다질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아이를 먼 곳으로 홀로 보냈다. 지금 아이는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 스스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기 위해 걸음마를 시작했다. 넘어지는 모습도 숱하게 대할 것이다. 그러나 이젠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 손을 내밀어주고 싶은 마음을 참아내기가 몹시 힘들지만 그것이 아이를 우뚝 서게 하는 방법이라 믿기에 애끓는 내 맘쯤은 입술을 깨물며 이겨낸다. 사랑은 정말 샘솟는 그대로 퍼붓기보다 상대를 위해 절제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온 몸과 마음으로 절감했다. 아직은 여리고 어린 아이를 먼 곳으로 혼자 떠나보낼 때의 심정이란 글이나 말로써는 차마 다 표현될 수 없을 만큼 극단적으로 아픈 일이다.

하지만, 보다 여물어진 모습으로 씩씩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배우게 되리라 기대하며 슬픔을 딛는다. 야트막한 산들과 평화로운 강물이 흐르는 곳에서 초록과 함께 호흡하며 좋은 또래의 벗들과 최고의 시간들을 보낸 뒤 아이는 정말 힘찬 날개 짓을 하며 돌아오리라. 아이는 전화를 통해 내내 터져 나오는 울음으로 날 멍들게 했지만 며칠이 지난 지금은 그 곳 말씨까지 써가며 적응하는 중이다. 역시 내 사랑스런 딸아이다.

그래, 아이야. 어쩜 내가 네게 준 것은 너를 위한 사랑이 아니었을 지도 몰라. 너를 사랑한다는 명분 아래 나는 내 기쁨을 원했던 것도 같아. 너에게 주었던 것은 너를 위한 것이 아닌 나를 위한 것이었을 수도 있을 거야. 주면서 정말 기뻤던 것은 나였으니까... 네가 행복해야 내가 행복할 수 있다 생각했어. 내 행복을 너에게서 얻으려 했어. 내게 있어 네가 전부가 되면 난 너에게 집요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을, 그건 사랑이 아니었을 거야, 독이었을 거야. 널 숨막히게 만드는 사랑이란 이름의 독.

그래서 때로는 참는 사랑이 더 가치가 있는 지도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