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2,694

대구 가시내


BY 선물 2004-03-14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로 오기까지 약 17년을 대구에서 살았다. 그리고 그 후로 지금까지 22년을 서울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살아온 기간과는 달리 내 정서의 대부분은 대구에서 이루어졌고 그런 까닭에 고향이라면 당연히 대구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면서도 때론 완전한 대구 사람도 못 되고 서울사람도 될 수 없는 어정쩡한 나를 발견하게 된다. 지금까지도 그러할진대 처음 전학하여 첫 서울생활을 경험할 때는 오죽했을 것인가. 그러나 나는 가끔 대구 가시내가 서울 깍쟁이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적응해 나가던 그 시절이 그리움으로 느껴진다.

서울로 전학을 하게 된 것은 고2때였다. 전학하기 전, 서울에 대한 이런 저런 정보를 습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낯선 곳. 그것도 서울특별시라는 특별한 곳으로 전학을 가려니 주눅들지 않기 위해서는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먼저 서울을 알아야만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나름대로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서울이란 곳은 남자친구 없는 여학생이 없고 늘 미팅을 하며, 교실분위기는 미국처럼 자유롭다는 것이었다. 물론 후일 직접 확인한 바에 의하면 상당부분 왜곡된 정보였지만 친구들은 내게 부러움을 표하면서 서울 가서 주눅들지 말고 어떻게 해서든 멋진 남자친구를 만들어 보라며 깔깔대고 웃었다. 보수적인 색채가 짙은 대구에서는 그 당시만 해도 날라리라고 불리는 친구들이나 남자친구를 사귀는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날, 별 수고를 하지 않고도 전학할 학교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당시 여학생들이 즐겨 읽던 월간잡지에 내가 전학하기로 결정된 학교의 기사가 실려 있었던 것이다. 교복자율화시범학교로 지정되었다는 소식과 교정에서 사복을 입은 여학생들의 활기찬 사진이 함께 실려있었다. 그 때문에 친구들은 나를 더욱 부러워했지만 정작 전학생의 신분이 되어야 했던 나는 조금씩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그런 내 마음도 모른 채, 이름 있는 학교로 전학 가는 것만 선망하고 있었다.

드디어 내 인생의 커다란 변환점이 될 서울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무리 당차게 마음  먹어도 서울은 대구와는 그 규모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처음 본 지하도라는 곳도 얼마나 신기했던지 길게 이어진 매끈한 지하도를 보며 롤러스케이트 타는 친구들은 이 곳에 오면 신나겠구나 하는 생각까지 혼자서 해 보았다.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지도 모르면서...

전학이 늦어 다른 식구들보다 서울생활을 뒤 처져 시작한 나는 괜스레 동생들 앞에서도 쭈빗거려지는 것이 홀로 외로운 객지 생활을 시작하는 서투른 아이의 마음이 되어있었다. 전학 첫 날,  전철을 처음으로 타 보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서울의 지하철 2호선은 종합운동장까지만 연결되어 있었는데 내가 다니게 될 학교가 바로 그 역에 위치해 있었다. 고작 집에서 두 정류장에 불과했지만 항상 그렇듯 처음이란 것은 정말 신기하고 즐겁게 느껴졌다.

학교 교무실로 들어서니 선생님들이 따뜻하게 반겨주셨다. 그리고 교장선생님께 직접 나를 데리고 가서 인사를 드리게까지 해주셨다. 정말 황감한 일이었다. 그 때 교장선생님은 지방에서보다 성적이 많이 떨어질 것이니 단단히 각오하라는 말씀을 해 주셨는데 결과적으로는 성적이 서울에서 더 많이 올라 대구에서의 내신성적이 오히려 대학입시에 더 불리한 결과를 가져다 주기까지 했다.

선생님의 안내로 나는 친구들 앞에서 인사를 하게 되었다. 먼저 내 이름이 칠판에 씌어졌다.
<이 윤주>
그 때 앞자리에 앉아있던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하였다.
"어머, 얘는 이름이 시골 이름이 아니네? 생긴 것도 시골아이 같지 않고..."
'뭐! 시골아이?' 나는 무척 당황했다. 대구는 시골이 아니다. 아주 예쁘고 멋진 사람들이 많이 사는 대도시이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해왔던 터였다. 그런데 얼토당토않은 시골 운운하다니 괜스레 울분이 느껴졌다. 그래서 오기가 나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내게 첫 인사로  노래나 한 곡 부르고 들어가라고 말씀하셨다. 독창에는 약하지만 합창에는 자신이 있어 늘 합창부에 속해있던 나는 거기서 배운 노래 <라노비아>를 멋들어지게 불러주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생각에 불과한 표현이지만... 훗날, 친해진 친구의 말에 의하면 그 때 다들 속으로 나를 빈정거렸다고 했다. 전학 온 주제에 과수원 길이나 부르지, 웬 라노비아냐고...

그런데 희한하게도 생각했던 것보다는 학교 생활이 덜 긴장되었다. 아니, 긴장이 덜 되었다고 표현하는 것조차 터무니없을 만큼 엄청나게 풀린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생물시간에 들어오신 선생님이 창 밖에서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꼬박꼬박 병든 병아리처럼 졸고 있는 처음 보는 전학생을 발견하고 만 것이다.
"저기 맨 뒤에 자주색 옷 입은 학생, 그만 자고 일어나 봐. 처음 보는 학생인데 나한테 자기소개를 해 줘야지."
그 전날, 전학 할 걱정 때문에 잠을 설친 것이 화근이었다. 민망해진 내가 그 때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다만 맨 뒷자리에 홀로 앉아 있는 나를 쳐다보며 웃던 낯선 친구들의 쌀쌀맞은 눈빛들만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도 내게 다정하게 대해주는 친구들도 여럿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곰살맞게 대해 준 친구가 있었는데 사실 그 친구 때문에 더 많은 친구들을 사귈 기회를 잃게 되리란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청소시간, 구역이 정해져 있지 않아 머뭇거리던 내게 그 친구가 다가와서 잠깐 자기를 따라가자는 말을 해 왔다. 마땅히 할 일을 찾지 못하던 차에 잘 되었다고 판단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친구를 따라나섰다. 친구가 데려간 곳은 학교 주변의 분식집이었다. 그제야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친구만 두고 학교로 되돌아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불편한 마음으로 친구가 사 주는 떡볶이를 먹고 학교로 돌아가니 다른 친구들이 다 나를 두고 쑤군거렸다. 그것이 전학 온 첫날 일어난 일이었다.

그래도 순한 친구들은 내 사투리를 신기해하면서 가깝게 다가왔다. 선생님들도 전학생이라 그런지 친절하게 대해주셨다. 그런데 시련은 또 찾아오고 말았다. 곱슬머리인 나를 생활주임선생님께서 당시 유행하던 핀컬파마라는 것을 한 것으로 오해하시고는 교무실로 몇몇 친구와 함께 호출을 하신 것이다. 나는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드라이로 잘 넘겨져 있던 내 머리를 쉽게 지나치실 기색이 아니었다. 결국은 아버지께 증명서를 받아 오라는 말씀까지 한 뒤에야 나를 돌려보냈다. 집에 가서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안 그래도 전학해서 학교생활 잘 하는지를 걱정하던 터라 딸아이의 그런 누명을 벗게 해 주시려고 온갖 정성을 다해 글을 써주셨다. '저희 아이의 머리는 천연적으로 타고난 곱슬머리로써 단 한번도 파마한 적이 없음을 증명합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선명한 도장까지 꾹 찍어주셨다. 단 한 글자도 잊을 수 없는 기막힌 증명서는 그렇게 해서 탄생하게 되었다.

그런 대로 학교생활에 익숙해져 가던 어느 날이었다. 한 친구가 미팅을 하러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남녀 각각 열 다섯 명씩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여학생이 모자란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호기심도 있었으나 그런 행위는 규율을 어기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던 터라 잔뜩 겁을 먹고 망설이게 되었다. 그렇게 주춤거리고 있던 사이에 친구들은 무조건 나를 끌고 약속장소로 데리고 나갔고 나도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고 스스로 합리화시키며 못 이긴 척 따라나섰다. 삼십 명이 모이는 장소는 중국집이었고 교복 입은 한 무리의 남학생들은 왠지 불량하게만 보였다. 주머니에서 물건을 하나씩 꺼내 고르는 것으로 짝을 정하게 되었는데 내가 꺼낸 동전은 그 중 키가 제일 작은 아이가 집고 말았다. 짝이 된 남학생은 자신보다도 훨씬 키가 큰 나를 보고는 잔뜩 주눅이 들었고 나도 덩달아 비참해져서 끝내 함께 일어서지 못하고 앉은 채로 몇 마디 나눈 뒤, 내가 먼저 자리를 뜨고 말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당황케 했던 것은 담배 피는 몇몇 남학생들이었다. 첫 미팅은 그렇게 상상과는 너무도 다른 아주 형편없는 추억이 되고 말았다. 또한 첫 단추가 중요하다는 말처럼 그래서인지 그 후로 미팅에만 나가면 비교적 키가 제일 작은 축에 속하는 사람하고만 파트너가 되는 것 같았다. 대구 친구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이 귀에 들려오는 듯 했지만 그 일 때문에 미팅을 통해 근사한 남자친구를 만드는 꿈은 포기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래도 웃음이 나오는 추억들이다. 물론 지금은 대구보다는 서울에 더 익숙해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서로 끈끈한 마음으로 연결된 친구들은 한결같이 대구 가시내들이고 서울에서 사귄 친구들과는 이상하게 연락조차 잘 되지 않는 편이다. 가끔 길에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아줌마들을 보게 되면 다 고향사람처럼 느껴진다. 다른 지방사람들이 보면 그들이 말하는 것을 싸움하는 것으로 오해할 만큼 시끄럽게 여겨질 테지만 내겐 그 모습이 그리 싫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푸근하기까지 하다. 아마 나를 이룬 곳이 그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왠지 이 곳에선 주류가 되지 못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서울을 벗어나선 살아본 적조차 없는 남편에게서도 그런 서걱거리는 이질감을 간혹 가질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는 대구 가시내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