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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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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슬픔


BY 선물 2004-03-07

지나간 시절의 노래를 들었다. 그러나 지나간 노래라 하여 트로트 풍의 옛 노래를 일컫는 것은 아니다. 그저 칠, 팔십 년대의 노래들, 추억이나 더듬을 수 있게 해 주는 그런 노래들이 내겐 그렇게 지나간 노래라 불려질 뿐이다. 맑은 노랫말, 수수한 통기타 소리, 소박한 옷차림의 가수들. 나는 한참을 넋 놓고 오도카니 앉아 텅텅 소리가 날만큼 자신을 비워둔 채, 그 어울림에 고스란히 스며든다.

그렇게 깊이 몰입하고 싶어하는 나를 보며 남편은 단지 회한에 젖게 되는 시간일 뿐이라며 다 부질없는 일이라 말한다. 회한. 대체 내게 남아 있는 회한이란 게 무엇일까만, 그러면서도 남편의 말에 내 고개는 절로 끄덕여진다.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느닷없이 ‘그래도 그 시간이 나는 좋아요.`하고 한마디 더 내뱉는다. 이번에는 남편의 고개가 알듯 말듯 끄덕여지는 듯하다. 무엇이 어떻게 좋다는 것인지 나조차도 알 수 없는 내 말을 남편은 도대체 어떻게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인 것일까? 궁금해진다.

평소 같으면 어색했을 텐데 웬일인지 말이 한 번 나오기 시작하자 그칠 줄을 모른다. 옛 노래들을 듣다 보면 괜스레 눈물이 나올 것 같다는 말도 흘린다. 가끔은 울고 싶고 또 한바탕 울어보는 것도 괜찮으리란 말까지 쑥스러운 줄도 모르고 마구 꺼낸다. 정제되지 않은 감정의 남발을 남편은 곁에서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다. 술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건만 내 말은 꼭 취객의 주정 같다. 어느 순간 갑자기 무안을 느끼게 된 연후에야 주춤거리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이래서 가끔은 술을 마셔야 하는구나하고 혼자 생각을 한다. 멀뚱한 내 정신은 때때로 뱉어내어야 할 감정의 배설물들을 도로 삼키게 하려고 무진장 애를 쓰게 하는 것이 영 재미가 없다.

그렇다고 아름다운 침묵으로 그 다음을 연결시키지도 못한다. 너저분하게 흘린 내 감정의 찌꺼기가 부끄럽다보니 안타깝게도 변명까지 연이어진다.
“눈물은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 같아요. 실컷 울고 나면 나 자신이 한 차례 정화가 되는 것을 느끼지요.”
여기까지 말을 뱉고는 꼴깍하고 침을 삼킨다. 더 이상 감정의 빗장을 풀었다가는 남편 앞에서 마냥 주책을 부릴 것만 같다. 아내라는 자리는 모든 허물을 숨김없이 보일 수 있어야 하는 자리인 것 같기도 하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해보면 지켜야 할 선도 분명히 있어야 한다고 느껴진다. 다 드러내는 것은 서로를 위해 삼가야 하는 일인 것 같다. 물론 정답은 없으리라. 그건 어디까지나 각 부부들만의 개별적인 성향에 따라 유동적인 것일 테니까...

어쨌든 나는 남편에게 주절주절 내 모든 감정을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다 드러내는 것이 싫다. 그래서 더 이상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게 된다. 그 다음은 어디까지나 내 몫이다. 혼자서 감당해야 할 몫이다. 그로 인해 외로우면 외로움을 즐기면 될 것이고 아프면 앓으면 될 것이다. 지금 글을 쓰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라고 말해도 무방할 듯 하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날 어떤 때는 정말 엉엉 소리내어 울고싶다. 그러다가 다시 말개진 얼굴로 싱긋 세상을 향해 웃어주고 싶다. 그렇게 말간 웃음 짓기 위해서는 먼저 울음으로 나를 정화시켜야 한다.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 절망해야 한다. 그것을 딛고 일어서야만 얄팍한 내 감정에 내가 휘둘리며 놀아나는 일이 없을 것 같다. 그래야만 지금보다 조금은 더 강해질 것 같다. 정말 그럴 것 같다.

이런 때는 그래서 혼자이고 싶다. 들켜서는 안되니까... 엄마라는 자리도, 아내라는 자리도, 며느리라는 자리도 지금의 약한 나와는 어울리지 않으니 잠시 어딘 가로 숨어들고만 싶은 것이다. 혼자인 나와 슬픈 음악과 한 잔의 술만 있는 그런 곳을 찾아 꿈틀거리며 가고 싶은 것이다. 술이야 마시지 않아도 좋으니 한잔만으로도 족하리라.

슬픈 음악을 찾는 것은 지금 내가 슬퍼지고 싶은 까닭이다. 나로 인해 슬픔을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 때문에 슬픔을 느낀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나야 좀 힘들어도, 좀 아파도, 좀 초라해도 그다지 슬프지 않다.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있다. 하지만,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힘들고 외로워 보이면 난 견디기 어려울 만큼 고통스럽다. 명치끝이 짜릿하게 아픔이 느껴진다. 남편의 지친 모습, 아이들의 못난 모습, 부모님의 약한 모습, 이런 것들 모두가 나를 슬프게 한다. 나 혼자서 지치거나 약해지거나 못나지거나 그러지 않을 자신은 있는데... 그러고 보면 나는 오간 데 없고 주변만이 내 곁에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나를 위해 한 번 감정의 사치를 부려보고 싶어진다. 온전히 나를 위한 눈물을 쏟아보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으니 이렇게 글로라도 실컷 울기 위해 깊은 밤 잠 못 이루고 발개진 눈 부릅뜨고 있는 것이다.

이 밤 그래서 글과 함께 나, 동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