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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곡하는 바다2


BY 선물 2004-02-10

<통곡하는 바다 1에 이어씁니다.>

 

그런 언니들의 삶을 바라보며 홀로 남겨지는 막내 용혜 또한 어찌 불행과 무관하다 할 수 있을지, 어린 용혜이기에 그녀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더욱 더 촉촉하게 젖게 된다. 그녀는 한창 꿈을 꾸며 행복해야 할 나이에 가족들의 비극을 모두 체험하고 만다. 또한, 휑하니 큰집을 지키면서 정신을 놓치고 만 언니와 늙고 병든 아버지를 모시며 살아가야 했을 때 그 작은 소녀의 힘으로는 얼마나 버겁고 힘든 일이었을지 정말 피해갈 수만 있다면 수백 번이라도 피하고 싶을 일이었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남몰래 흘리던 그녀의 눈물을 보았을 때 그 외로움이 함께 느껴져서 내 눈시울도 덩달아 젖고 말았다.

하지만, 내 가슴에 아픔으로 남은 여러 여인들 중에서 정말 피하고 싶은 인물을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김 약국의 처 한실 댁을 꼽을 것이다. 용옥의 슬픔 또한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크나큰 아픔이지만  자식을 둔 어미입장에서 느낀 한실 댁의 슬픔은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다. 그렇게 딸들의 비극을 지켜보아야 했던 어머니의 아픔. 그것이야말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으리라. 그나마 용옥의 기막힌 비극을 보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고 싶은 마음이다.

어른들이 자주 하시는 말씀 중에 자식 둔 사람이 큰소리 쳐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다. 한실 댁은 애지중지 기르던 딸들이 자신의 가슴에 못박는 일을 하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던한 한실 댁도 딸들로 인해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을 겪으며 인생무상을 느낄 수밖에 없게되고 그 고통은 다른 사람들로 인해 딸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는 것만큼이나 아프게 어미 된 사람의 마음을 시퍼렇게 멍들였을 것이다.

이렇게 이 글이 여인들의 아픔을 녹여 낸 때문인지 나는 `김 약국의 딸들'과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함께 떠올리게 될 때가 많다. 어쩌면 `여자의 일생'이라는 글 제목과 이 글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고통스러운 삶이 `성(性)의 굴레'라는 하나의 끈으로 연결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인 듯도 하다. 그리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언젠가 두 작품이 함께 거론된 글을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한데 그 때문에 두 작품을 함께 떠올리게 되었으리라는 생각도 갖게 된다.

사실 나는 성(性)에 대해 특별히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진 페미니스트는 아니다. 그런데도 때때로 여자라는 성(性)이 몹시 억울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것은 결혼과 동시에 갖게 된 심각한 무게의 혼란이었다. 결혼 이전의 인생에서는 굳이 남녀문제에 대한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을 만큼 동등한 남녀관계를 누리며 생활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혼 후에는 내 인생의 주체가 과연 나 자신인지 그것조차 혼돈스럽게 생각될 때가 많았다. 나의 삶, 나의 문제임이 분명한 일에서도 결정의 주체는 내가 아닌 남편이란 생각이 들 때가 많았던 것이다. 물론 함께 하는 동반자란 생각에서 남편을 바라보면 그런 삶을 조화로운 삶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냉정한 눈으로 들여다보면 그것은 자신의 마음을 평화롭게 하기 위해 스스로를 세뇌시키려는 억지스런 생각에 불과해 보인다. 그저 소중한 가정의 평화를 지키고 싶은 소망에서, 한 집안이 조용하려면 여자가 참아야 한다는 그 희한한 족쇄를 신앙처럼 받들며 어리석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지금의 내 모습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이 될 것 같다.

물론 요즘 여성들이 다 그렇게 어리석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변화된 세상에도 불구하고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여전히 그렇게 여인들의 희생과 양보로 가정의 평화가 지켜지는 것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평화는 왠지 불안해 보인다. 알게 모르게 쌓인 그런 성적(性的) 억압감은 어떤 형태로든 발산되어야 하고 또 위로 받아야 할 것이다. 나는 주로 그런 위안을 글에서 찾게 될 때가 많다.

그래서일까, 참으로 묘하게도 이 글이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비극을 품고 있는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왠지 모를 속시원함과 대리만족 같은 쾌감까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애타는 안타까움은 가졌을 망정 어떤 비참함이나 비굴함 같은 개운치 않은 감정으로 속을 끓인 적은 한 번도 없었음을 함께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이 글에 등장하는 여성들 한 명 한 명을 떠올리다가 찾게 된 그녀들의 공통점 때문이었으리란 생각이 든다.

처음 비극을 잉태한 숙정으로부터 성수의 사촌누이 연순, 김 약국의 딸들, 그리고 김 약국을 흠모한 기생 소청에 이르기까지 그녀들은 한결같은 미덕을 갖고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그녀들의 당당함이었다. 세상이 그녀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는 상관없이 우선은 남자들 앞에서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초라해지거나 비굴해지는 모습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나를 참으로 통쾌하게 해 주었다. 결코 주눅들지 않고 오히려 더 당당하게 서 있을 수 있었던 그녀들은 한결같이 빛나는 모습이었다.

정절을 의심받으며 모욕적인 대우를 받고 사느니 차라리 죽음으로 항변하려 했던 김 약국 성수의 모친 숙정. 사촌동생 성수를 연민으로 감싸안은 병약했던 연순. 오빠인 봉제영감보다 더 단단히 집안을 단속하려고 애쓰는 성수의 고모인 봉희. 자신의 어려운 처지에도 아랑곳 않고 배를 타다 목숨을 잃은 식구들을 기꺼이 돕고자 했던 넉넉한 마음의 한실 댁. 그리고 과부임에도 주눅들지 않고 악착같이 살아가는 용숙. 그 시대의 당연한 사고방식을 뛰어 넘어서 어머니 한실 댁을 무시하는 듯한 아버지 김 약국에 대한 반감을 가질 줄 아는 용빈. 과감히 자신의 사랑을 찾아 행동하는 용란.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남편 기두에게 애정을 구걸하며 매달리는 모습을 끝까지 보이지 않고 아픔을 감출 줄 아는 용옥에 이르기까지 이 글의 여성들은 한결같이 그렇게 당당했던 것이다.

박 경리님과 모파상의 두 작품이 여성의 아픔을 묘사했다는 점에서 얼핏 비슷하게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뭔가 확실한 차이를 느끼게 하는 것이 바로 그런 점 때문이리란 생각이 든다. 박 경리님은 등장인물들에게 생명을 부여함과 동시에 굳센 힘을 함께 실어 주셨다. 특히 여인들에게 그런 아름다운 힘을 많이 주신 것 같다. 그것은 `김 약국의 딸들'뿐만 아니라 박 경리님의 작품들에 나오는 대부분의 여인들에게서 느껴지는 힘이다. 그리고 글 속의 인물들에 하나하나에 대한 작가 분의 애정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아마 그 때문에 나도 끝내 책 덮기를 망설였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작가가 글 속의 인물들에게 많은 애착을 갖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 읽는 이 또한 더 진한 감동을 맛보게 되고 마치 등장인물들과 하나가 된 것 같은 일치감까지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김 약국의 딸들'은 충분히 사랑 받을 수밖에 없는 작품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진지하게 그려진 그 시대 여인들의 삶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었다.

오히려 이 글에서는 상대적으로 남성들이 작고 못난 모습으로 그려진다. 물론 여러 가지 상황들을 볼 때 그들이 초라해질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게 되는 면도 있다. 이 글의 중심인물인 김 약국부터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아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점잖고 올곧게 살기는 했으나 유약했고 세상물정에 어두웠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결국 말년의 고단함을 그를 사모하는 기생 소청에게 의지하게 되는데 그가 소청을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 초라해 보인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김 약국의 일을 대신 보고 있던 기두 또한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참으로 많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 사람이었다. 결국 그런 약한 의지 때문에 자신의 처 용옥과 아이를 지켜내지 못하는 가엾은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한 때 용빈과의 사랑으로 결혼을 의심치 않았던 홍섭. 그는 김 약국의 몰락과 함께 변심한 마음으로 용빈을 떠나지만 한 때의 실수 때문인 것으로 변명하는 못난 모습을 보이게 된다. 또한, 용빈에 대한 미련을 끝끝내 떨치지 못하는 초라한 모습으로 남고 만다.

이 글에서 인생을 비교적 멋스럽게, 그리고 아내와의 좋은 금실로 평안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인 김 약국의 고종사촌인 중구영감 또한 결코 세상을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포부 있는 사내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의 두 아들도 지성은 승하였으나 자학적인 면이 있어 어느 정도는 세상과 거리가 있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으로 보여졌다.

이렇게 한결같이 남성들은 위축되고 잔뜩 웅크린 모습으로 묘사되거나 아니면 연약한 여성 앞에서도 주먹이나 앞세우는 졸렬하고 포악한 남성성을 가진 모습으로 표현되는 부분들이 많아 보인다. 물론 그들에 대해서도 따뜻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지만 그래도 보다 큰그릇으로 그려지는 여인들을 보니 나는 자꾸 대리만족을 느끼며 속이 시원해지는 것이다.

그 외에도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선물은 또 있다. 그것은 낭만적인 감정에 고급스럽게 빠져볼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용빈과 지인(知人)들이 나누는 대화 속에서 아주 멋스런 표현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 표현들을 접하다 보면 사람이 몽롱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묘한 신비감이 느껴지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꿈을 가지게끔 배려한다. 아름다운 젊음. 비록 슬픔이 깃들어 있는 젊음일망정 그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을 엿볼 수 있다.

이제 글은 끝나고 나는 홀로 남겨진 기분이다. 그러나 나는 멈춰지지 않는다. 내 가슴이 계속 글을 이어서 써내려 가고있다. 용빈과 강극의 사랑을 이끌어낸다. 용숙은 조금씩 마음의 변화를 일으켜서 가엾은 동생 용란을 끌어안고 살아간다. 어쩜 기두도 측은지심으로 용란을 보살필지도 모르겠다. 용혜는 정윤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학업을 마치게 된다.

나의 글 이어 쓰기가 어쩌면 이 작품을 참으로 유치하게 만들어버릴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남겨진 사람들에게 작은 행복을 선물하고 싶어지는 내 마음을 이해 받고싶다. 그렇게 남겨진 사람들. 그들이 자꾸 내 마음을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요즘 어려운 경제로 인해 참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많다. 나 또한 그런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 속할 것이다. 정신적인 풍요를 강조하며 그 속에서 만족을 얻으려 했던 나. 그러나 삶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음을 절실하게 느낀다. 다만, 그런 고단함이 나 혼자만의 짐이 아니라 함께 하는 사람들이 많음을 알기에 견뎌 나가는 일에 조금은 위로가 된다. 그 위로에 `김약국의 딸들'도 함께 해 주리라 생각한다. 세월을 훌쩍 뛰어 넘어 내가 그들을 진심으로 위로하는 맘이었듯 그들도 내 곁에 머물며 가시밭길 같은 인생 길을 헤쳐 나갈 힘을 줄 것으로 믿는다. 여전히 매스컴에서는 화려한 인생들의 이야기를 많이 조명하지만 그래도 나는 외롭지 않다. 비록 나 혼자만이 유일한 독자가 된 이어 쓴 이야기지만 그 속에서 희망을 주는 만큼 스스로도 희망을 얻을 수 있는 지혜를 나름대로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어쩌면 그 몫은 작가 님께서도 기꺼이 내 몫으로 돌리시며 모른 척 눈감아 주시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믿음도 가져본다.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참 맑다. 남겨진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물한 내 마음도 따라서 하늘 빛 싱그러운 마음이 된다. 이제 더 이상 울고 있는 여인들이 아닌, 활짝 꿈을 펼치며 희망을 먹고 살아가는 여인들을 가슴에 안고 보다 힘찬 걸음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멋진 항해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