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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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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함께 빙글빙글


BY 선물 2003-11-05

여러 가지 일들이 한꺼번에 겹쳐 몹시 바빴던 하루였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중 1인 큰 아이까지 나를 종종걸음치게 만들고 만다. 가뭄에 콩 나듯 그렇게 드물게 울리는 내 핸드폰으로 문자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보호자 확인을 한 통신표를 학교로 가져다 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를 닮아 덜렁거리는 큰 아이는 이런 일로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 때가 가끔 있다. 그런데 학교까지의 거리도 제법 멀어서 바쁜 날에는 그런 일이 여간 짜증스럽게 느껴지질 않는 것이다.

중학생쯤 되었으면 이제 스스로 알아서 챙길 줄 알아야 할 나이이고 잘못에 대한 책임 또한 스스로 질 줄 알아야 할 때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슬그머니 아이의 부탁을 무시해 버리고 싶어진다. 엄마가 언제까지 챙겨 주어야 하는 것인 지 한심한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생님께 혼이 날 아이의 모습을 떠 올리면 가엾은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약해지고 만다. 더구나 문자메시지에 남긴 딸아이의 플리즈란 애교스런 표현은 차마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대충 채비를 하고 딸아이가 다니는 등교 길을 따라 학교로 향하고 만다. 그런데 막상 그 길을 걷다 보니 처음의 짜증은 오간데 없어지고 점점 기분이 맑아지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었다. 드라마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그림처럼 예쁜 집들이 즐비한 길은 나를 잠시동안 동화 속 세계에 온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해주고 오랜만에 걸어 보는 낙엽 쌓인 길은 낭만을 선물하며 내 발걸음을 태엽 풀린 인형처럼 폴짝이게 만든다. 그렇게 상쾌해진 마음으로 학교에 들어 서니 이번에는 운동장에서 체육수업을 받고 있는 아이들의 밝은 목소리와 활기찬 움직임이 또 나를 들뜨게 만들었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내 아이마냥 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아마 그 순간만큼은 나의 눈빛도 아이들을 많이 닮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허락된 뿌듯한 평화는 안타깝게도 거기까지였다.
아직 수업이 진행되는 시간이라 교실 밖 복도에서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나는 교실 안에서 울려 나오는 쩌렁쩌렁한 여선생님의 화난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살짝 바라 본 교실 안 풍경은 젊고 고운 여선생님이 몇 몇 아이를 앞에 두고 심하게 나무라시는 모습이었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인 나는 궁금함도 함께 느끼며 자꾸 발뒤꿈치를 들어 교실 안을 살짝살짝 훔쳐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순간 옆 교실에서 아이 둘을 데리고 남자 선생님 한 분이 나오시는 것이었다. 나는 얼른 벽 뒤로 몸을 숨겼다. 자세히 보니 도덕 선생님이신 딸 아이의 담임선생님이시다. 항상 기본을 중시하시며 아이들을 올바르게 이끌어 주시는 그 분은 정말 스승이라는 이름 위에서 한 치의 부끄러움 없이 서 계실 수 있는 존경스러운 분이시다. 나는 딸아이에게 선생님을 존경하라고 서슴지 않고 말할 수 있게 해 주신 그 분이 늘 감사했다. 그런데 그 분 또한 아이들을 나무라시면서 언짢으신 표정이셨다. 혼이 나는 아이들을 보니 자꾸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무엇 때문에 수업을 하시던 두 선생님이 저토록 애를 태우시며 안타까워 하고 계신 것인지 아이를 키우는 학부모 입장에서 정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잠시 후 선생님은 아이들을 데리고 교실로 들어 가셨다. 그제야 벽 뒤에서 나와 다시 딸아이 교실 안을 살펴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꾸지람을 듣고 있던 한 여학생이 자기 자리로 들어 가면서 마치 선생님을 조롱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는 비웃음같은 웃음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찰나처럼 본 그 웃음은 잠시 나를 섬뜩하게 만들만큼 냉소적이었다. 그 웃음에 멍해져 있던 사이 교실 문이 갑자기 열리면서 선생님이 밖으로 나오시는 것이었다. 결국은 내 궁금증이 화근이 되어 나는 참으로 민망한 순간에 선생님과 정면으로 딱 맞닥뜨리고 만 것이었다. 순간 죄인이 된 것만 같았다. 그래서 깊이 고개 숙여 인사 드리는데 선생님은 어쩔 줄을 몰라 하시며 고개를 돌리시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울고 계셨던 것이다. 아이들 앞에서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밖으로 나오신 것이었다.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나는 못 본 척 그 자리를 물러나고 말았다. 선생님은 혼자 어디론가 가셨고 나는 그 틈을 타서 뒷문으로 아이에게 통신표를 전달해 주고 그 곳을 얼른 빠져 나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 오는데 그 길은 조금 전과는 달리 무거운 마음 때문인지 점점 스산해져 가고 있었다. 나중에 학교에서 돌아 온 아이에게 전해 들은 사건의 내용은 정말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었다. 선생님은 수업 중에 심하게 떠든 아이를 앞으로 나오게 해서 혼을 내셨는데 꾸지람을 듣는 태도까지 너무나 안 좋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손바닥을 때리려고 하셨으나 아이들은 맞을 이유가 없다면서 손을 내밀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학생 둘은 그래도 손을 내밀어 맞았지만 여학생들은 끝끝내 손은 내밀지 않고 선생님께 심하게 대들었다고 했다. 선생님은 체벌해야 하는 이유를 교육적으로 설명까지 하셨지만 아이들은 차라리 자신들을 학생부로 넘기라면서 선생님을 완전히 무시해 버린 것이었다. 비교적 유순하신 편인 그 분은 결국 모욕감만 느낀 채 아이들을 제 자리로 들여 보내셨고 선생님을 얕잡아 본 아이들은 오히려 비웃음을 보내며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욕까지 내뱉았다는 것이었다. 아마 나를 섬뜩하게 만든 것이 그 웃음이었으리라. 그런 사실을 알고 나니 정말 선생님 앞에서 무릎이라도 꿇고 사죄 드려야 될 것만 같았다. 물론 그것으로는 어떤 위로도 될 수 없었을 것이지만...

내 아이가 그러지 않았다는 것 만으로는 나 스스로를 위로할 수도, 그 어떤 책임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자식 둔 부모는 절대로 큰 소리 쳐서 안 된다는 말이 있다. 어떤 부모가 자기 자식이 그런 몹쓸 행동을 하리라고 생각할 것인가?
말랑말랑 보드랍던 살결은 성난 몸이 되어 사사건건 세상에 맞서려고 하는데...
맑고 투명하던 깨끗한 눈망울은 혼탁한 세상의 때를 묻히면서 타인의 마음을 할퀴듯 쏘아 보는데...
앙증맞게 오물거리던 귀엽기만 하던 그 입술은 거친 말로 뒤범벅되고 가장 잔인한 말로 상대방에게 상처 주기를 주저 않는데...
그 누가 한 없이 사랑스럽기만 하던 자신의 아이를 그렇게 변해 갈 것으로 상상할 것인가?

그러나 문제는 그런 행동을 하는 아이들을 보는 것이 이젠 아주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물론 아이들을 이해해 주고 싶다. 그저 자라나는 과정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 보고 싶다. 시간을 겪으며 성장해 나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세상을 이해하는 눈과 따뜻함을 소중히 생각하는 가슴을 지니게 될 것이라고 그렇게 희망을 가져 보고 싶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봐도 그렇게 지나가게 되지를 않는다. 선생님께 침을 뱉는 아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했다고 그 친구에게 "네 엄마는 창녀야!" 라는 망측한 말을 서슴지 않고 내 뱉는 아이. 그런 아이들을 보며 어떻게 희망을 가질 것인가. 훗 날 철이 들어 스스로를 뉘우치게 된다고 하여도 이미 그들로 인해 엄청난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될 마음들은 어떻게 보상해 줄 수 있을 것인가.

이제 두려워진다. 아이들만 보호받을 대상인 것은 아니다. 이젠 어른들도 아이들로부터 상처 받지 않도록 스스로를 보호해야 할 때가 왔다. 내 아이에게 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 친구들은 무시하고 못 본 척 하고 간섭도 관심도 갖지 말라는 말을 한다. 어쩌면 나는 참으로 비겁한 어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들을 나무라던 어른이 그들로부터 목숨까지 어이없이 잃었다는 이야기들을 들으니 나는 내 비겁함도 애써 보지 않으려 하게 된다. 그래서 남편에게 부탁한다. 폭주족이 다가 오면 무조건 비켜 주고 시비를 걸어 와도 무조건 못 본 척 참으라고 그렇게 간곡히 부탁한다.

세상이 험할수록 잘못을 나무라고 고쳐 주려는 진정한 어른이 꼭 필요할 것이다. 조금만 방향을 잘 잡아 주면 다시 곧게 자랄 수 있는 아이들도 참 많을 것이다. 그러나 겁이 많은 나는 이제 그 일을 남이 대신 해 주기만을 바라게 된다. 나는 자꾸 뒤로 숨고만 싶어진다. 아이들이 무서워지는 나는 조금씩 도는 것만 같다. 세상과 함께 그렇게 빙글빙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