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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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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되면 이리도 이쁜 것을...


BY 선물 2003-10-04


며칠 전부터 아침이면 심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살짝 살짝 남몰래 드리는 기도가 있었다. 차마 밝히기 부끄러운 기도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야구 선수 이승엽의 홈런 아시아 신기록수립에 대한 기원이었다. 참 할 일도 없는 사람인가보다 하고 생각한다면 실상 할 말이 더 많아진다. 참 할 일이 많은 사람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바쁜 중에 그런 기도를 하는 것은 바로 나의 대단한 애국심 때문이다.

아마 하느님께서도 피곤하시리라. 매 번 잃어 버린 물건이나 찾아 달라고 있는 대로 발 동동 굴리며 기도로 조르더니 이젠 어떤 경기가 있으면 자기 편 이기게 해 달라고 또 기도로 귀찮게 조르니 말이다. 그것도 여간 간절한 것이 아니라서 도저히 안 들어주고는 한 시도 조용히 쉴 틈을 갖지 못하게 한다. 오죽하면그 분이 세상을 크게 바꿀만한 일이 아니라면 못 이긴 척 들어주는 편을 택할 것인가... 그것도 모르고 자신의 신통력이려니 믿고 있는 나를 어쩌면 참으로 딱하게 여기고 계실 것 같다.

역시나 이번에도 내 기도를 어김없이 들어 주셨다. 그 기도의 내용이란 것이 마지막 날 경기에서라도 좋으니 한 방만 더 시원한 홈런을 날리게 해 주십사 하는 것이었다. 이 승엽 선수는 과연 이런 사실을 알까? 모두 자기 실력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 같다. 아니면 예쁜 아내의 덕이라고만 생각할테지.

나는 가끔 이렇게 엉뚱한 일에 온 마음을 다 쓸 때가 있다.
지난 해 월드컵 때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친정집은 스포츠에 열광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시부모님은 전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으신다. 남편은 그래도 좀 나은 편이지만 나의 뜨거운 염원을 담은 정열적인 응원에는 턱없이 모자란다. 신문을 보니 거리 응원이 한창이라고 하는데 나도 좀 그렇게 뜨거운 열기를 느끼고 싶어졌다. 우리나라 선수가 골을 넣으면 두 주먹 불끈 쥐고 갈라지는 목소리로 터질 듯이 `골인'을 외치며 펄쩍 펄쩍 뛰다 보니 어른들 계신 집에서는 그 감격을 충분히 표현하기가 여간 민망스러운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 절호의 기회가 왔다. 딸아이가 친구들과 함께 거리 응원에 나선다는 것이었다. 다른 때라면 엄마도 같이 가자는 아이의 청을 일언지하에 묵살하였겠지만 그 때는 아이의 요청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호하겠다면서 따라 나서기를 자청한 것이다. 어머님께는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사람 많이 모인 위험한 곳에 아이들만 보낼 수 없어서 무척 귀찮기는 하지만 내가 같이 가야 할 것 같다며 허락 아닌 허락을 받아내고 말았다. 그러나 방방 뜨면서 좋아한다는 표현이 딱 들어 맞을 그런 내 모습을 예민한 어머님이 절대 놓치셨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나라가 이기면 바깥으로 뛰쳐 나가 `대한민국,빰빠빠빰빠' 하는 괴성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질렀으니 돌이켜 생각해도 그 때의 기쁨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나는 이번 아이학교의 가을 운동회에서도 또 그런 감동을 맛보았다. 우리 아이가 청군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청색 원을 가슴에 붙인 아이들은 하나같이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이었다. 반대로 백군인 친구들은 평소에 내가 귀여워했던 아이들임에도 불구하고 덜 예뻐 보이는 것이었다. 그런 편향된 감정은 정작 아이들보다 어른인 내가 더 심했던 것 같다. 청군이었던 아이들은 한 아줌마가 왜 그렇게 저희들을 흐뭇한 눈길로 바라 보았는지 적잖이 당황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청색 원만 보면 누구를 막론하고 토닥거려 주려 했으니까...

정말 절박한 마음으로 승리를 원하는 경기가 있을 때면 나는 앉아서 경기를 관람하지 못한다. 왔다 갔다 하면서 안절부절 못하게 되고 극적인 순간이 되면 눈도 감고 귀도 막으며 차마 경기를 보지 못하니 때때로 듣게 되는 경기후 쇼크사라는 것이 황당한 일만은 아닌 것 같이 여겨진다.

예전에 남편에게 궁금한 것을 하나 물어 보았다. 내가 심장이 약한 사람도 아니고 혈압이 높은 사람도 아닌데 왜 응원을 해 주어야 하는 그런 경기를 보면 가슴이 터질 것 같고 꼭 우리 편이 질 것 같이 불안한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자 남편은 바로 `우리'라는 그 마음 때문이라고 말해 주는 것이었다.

`우리'
어쩌면 정말 이 한마디가 갖는 힘이 그렇게 대단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줄다리기를 할 때 나와 함께 힘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가깝게 여겨질 수가 없다. 단체 경기가 있을 때면 일 대 일로 하는 경기에서보다 더 악착 같은 마음이 되고 조금이라도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을 발견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기분이 언짢았던 사람들도 싸워야 할 상대가 있는 상황에서 우리 편이 되었을 때는 미움도 오간데 없어지고 동지애만 남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월드컵경기 때의 승리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 길거리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도 다 `내 사람'처럼 생각이 된 것이었다. 음식가게 주인들은 공짜 식사나 술을 대접하기도 했고 모르는 사람의 땀냄새 나는 몸과도 거리낌 없이 부둥켜 안기도 했던 것이다. 내가 누리는 그 기쁨보다 몇 갑절 감동적인
행복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누리는 기쁨이었던 것이다.

이번에 이승엽선수가 라이벌 지역인 광주에서까지 열렬한 홈련 응원을 받게 된 것도 모두 같은 이유에서이다. 좁은 땅덩어리 그 속에서 우리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될 때는 너와 내가 결코 따로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늘 그 날이 그 날 같은 하루 하루 속에서 그래도 가끔씩은 그런 감동을 맛보고 싶어진다. `우리는 하나이다'라는 벅찬 감동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