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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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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절대 강자


BY 선물 2003-09-21

시골 아는 분께 부탁 드렸던 마른 고추 서른 근이 도착했다.커다란 포대로 2포대가 가득하다.거실에 펼쳐 보니 커다란 돗자리 2개로도 모자란다.그것을 보자 또 큰 일거리 하나가 생겼다는 생각이 먼저 앞선다.
이제 저 마른 고추를 하나하나 꼭지를 따서 물걸레로 닦아 내고 가위로 고추를 갈라 씨를 털어 낸 뒤 방앗간에 가서 곱게 가루로 빻아야 한다.잠시 머리가 아득해 졌지만 전날 밤 느껴졌던 몸살 기운이 조금은 덜해진 듯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년에도 이 맘 때쯤 고추 서른 근이 왔었다.그 당시 남편이 새로 시작한 일을 돕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고단해서인지 몸 상태가 좋지를 못했다.하루는 몸이 으슬으슬 한기가 느껴지는 것이 내가 가장 못 견디는 열 감기 기운이라 느껴져서 병원에 가서 진찰 받고 약을 지었다.보통 기침이나 콧물 감기는 비교적 수월하게 지나가는 편이지만 유독 열이 오르는 감기는 잘 이겨내지 못하고 몸 져 드러눕게 될 때가 많다.
평소에는 웬만큼 무리를 해도 끄덕 없는 건강체라 자부하던 몸이지만 일단 열이 오르기 시작하면 마치 온 몸이 뭇 매라도 맞은 양 아파 오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그런 까닭에 큰 일을 앞두고 이런 몸살 기운이 느껴지면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병원으로 향하게 된다.
그러나 그 때 병원에 들렀다 약을 지어 집으로 돌아온 나를 기다린 집은 편히 쉴 수 있는 아늑한 쉼터가 아닌 며칠을 수고해서 손질해야 할 고추 서른 근이 기다리는 일터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머님께 나의 아픈 증상을 말씀 드리면서 일을 조금 미루기를 청했더니 어머님은 혼자서 쉬엄 쉬엄 할 것이니 걱정 말고 들어 가서 쉬라고 말씀하신다.하지만 비록 게으르긴 할 망정 일을 피하려고 꾀 부리고 싶지는 않은 나이기에 어머님의 그 말씀을 듣고 그만 울상이 되고 만다.
하루 이틀 정도만 잘 쉬고 몸을 추스르면 훨씬 좋은 몸 상태로 일을 하련만 결코 일을 미루시질 못하는 어머님 성품을 잘 아는 지라 물 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하고서도 어쩔 수 없이 거실에 널려 있는 고추 앞으로 가서 앉게 되었다.사나흘 정도 걸려야 마무리 할 수 있는 그 일을 하는 며칠 동안 내가 무슨 정신으로 견디어 냈는지 지금 생각해도 머리가 지끈거려 올 정도이다.

중간 중간에 멈추지 않는 기침과 열이 올라 눈물 고인 눈으로 힘들어 하던 나를 보시던 어머님은 그만 들어 가서 쉬라고 하셨지만 당신도 온 몸이 편찮으시면서도 끝까지 일을 마무리 하려 하시는데 그냥 모른 척 내 몸만 생각하고 들어 가서 쉰다는 것이 나 스스로도 용납 되지 않는 것이었다.결국 그렇게 일을 마무리 하고 방으로 들어 가서 쓰러지듯 지쳐 누워 있으니 괜스레 서글픔의 눈물이 흐르면서 애꿎은 베갯잇만 적시고 말았다.

그런데 이번에도 고추가 오기로 한 며칠 전부터 몸이 심상치가 않은 것이다.추석부터 힘들었던 것이 계속 되는 일거리로 쉬지를 못해서 기어이 탈이 나는 것만 같았다.아플 때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입장이라면 그렇게 만사 제쳐 놓고 이불 신세를 지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겠지만 그런 입장이 못 되는 나는 아픈 그만큼 나만 힘들어 진다는 것을 알기에 이번에도 병원을 서둘러 찾아 약을 먹었고 그 덕분에 작년처럼 힘들지는 않게 고추를 손질 할 수 있었다.물론 이번에도 어머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와 함께 일해 주셨다.

하지만 나는 몸과 마음 중 어떤 것이 편한 것이 더 좋으냐고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마음이라고 답하는 사람이다.그러니 어머님의 도움이 비록 내 몸을 덜 힘들게 하실지언정 맘은 불편하게 하시니 진심으로 어머님은 일을 못 본 척 하시고 들어 가서 계시면 좋을 것 같았다.그래서 조금 늦더라도 무리 가지 않게 일하고 싶어 하는 나와, 일을 미루시고는 잠시라도 못 견디시는 어머님은 서로를 참 힘들게 느끼게 될 때가 많은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내 마음을 솔직히 말씀 드리면서 어머님께 일을 못하시게 하면 "니,내 성질 모르나.난 일 놔 두곤 못 산다.이 성질 때문에 내가 이렇게 힘든지를 다 알지만서도 어쩌지 못하는 것 보면 내게 문제가 참 많은 것 같다."라고 말씀 하신다.그렇게 어른스런 양보의 말씀을 들으면서 어머님께 불평하는 맘을 갖기는 정말 어렵다.

다만 그래도 내가 딸이었으면 나도 어머님도 조금은 다르게 서로를 대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나도 내 아픈 것을 어떡해서든 투정 부려서 일을 미루었을 것이고 어머님도 내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일하고 있을지를 헤아려 주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그저 참고 일할 정도가 되니 나와서 저렇게 일하는 것이려니 하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마시니 조금은 야속한 마음도 생기게 된다.
우리 어머님은 정말로 자식들에게는 한량없이 자애로우신 분이시다.자식들의 재채기 소리에도 온 마음을 다 쓰시는 분이시다.

그런 어머님을 뵈면 나도 `내 엄마'가 그리워진다.엄마는 열 감기에 내가 얼마나 힘들어 하는지를 너무도 잘 아시는 까닭에 나를 위해 무엇이라도 하나 더 해서 먹이려 하시고 늦은 밤에 열이 오르면 어디까지 가서라도 약을 구해 오셨다.설탕물이 감기에 좋다는 민간요법을 어디서 들으셨는지 감기 때마다 설탕물도 꼭 타 주셨는데 설탕만큼이나 달디 단 엄마의 사랑이 그 속에 함께 녹아 있어서인지 정말 약보다 더 빨리 나를 낫게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엄마로부터 극진한 보살핌을 받는다는 것,그 따뜻한 사랑의 힘은 나를 참 행복하게 했다.그래서 몸은 아파도 맘껏 응석 부리고 대접 받을 수 있는 감기가 그리 싫지 만은 않았다.

이제 세월이 흘러 내가 예전의 엄마처럼 꼭 같은 자리에 서 있다.언제나 든든한 내 버팀목이었던 보호자라는 자리에 내가 서 있는 것이다.아이들에게도 연로하신 시어른 께도 젊은 내가 보호자인 것이다.
그래서 항상 아이들을 보살피고 시어른들의 안색을 살펴 드려야 한다.예전의 엄마처럼 밥상에 차려서 방으로 가지고 들어가 한 술이라도 더 먹이고 또 잡숫게 해 드려야 하는 것이다.그리고 엄마라는 자리는 그런 것이 억지로가 아닌 절로 우러 나는 그런 자리임을 실감하고 있다.

내 기억에도 늘 엄마의 젖가슴은 풍성했던 것 같고 그 품을 파고 들면 향긋한 엄마 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그 냄새는 언제나 나를 든든하게 해 주었고 꿈처럼 아늑한 평화를 느끼게 해 주었다.그런 엄마가 아프면 세상 전체가 기운을 잃은 것처럼 보였으니 내게 엄마라는 자리는 늘 푸른 상록수와 같은 절대 강자의 모습으로 계셔 주기를 원했었다.

그러나 나는 예전의 엄마같은 그런 엄마는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몸이 아프면 마음도 약해진다.누군가 나를 위해 맛있는 것을 해 주었으면 좋겠고 끓는 몸을 식히기 위해 이마에 젖은 타올을 얹어 줄 따뜻한 손길이 기다려진다. 병원에 가 보라는 삭막한 말 대신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 주는 가족들의 배려에 아이처럼 감동하고 마니 아무래도 나는 꿋꿋한 사철 푸른 나무는 아닌 것 같다.

때로는 쉬어 가라고 몸도 아프다는데 마음 놓고 쉴 수도 없는 엄마라는 자리는 그래서 때로는 서럽기만 하다.그러나 내 소중한 가족을 맘껏 위할 수 있는 이 자리의 역할을 기꺼이 감내하고 싶으니 약하면서도 그렇게 강해질 수 밖에 없는 엄마는  어쩜 정말 아름다운 절대 강자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