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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 처세술


BY 선물 2003-08-22

빨아놓은 이불 홑청을 개키려는데 아무래도 혼자서 하기엔 너무 넓어 보인다. 어떻게 아셨는지 어머님께서 도와주시려고 방에서 나오셨다. 서로 마주 보며 홑청을 접어가고 있는데 생각처럼 아귀가 착착 맞아떨어지질 않는다. 그러자 어머님께서는
"그럼 그렇지. 너랑 나랑 맘이 잘 안 맞는데 이게 쉽게 맞아떨어질 리가 없지."라고 하신다. 나는 금세 샐쭉한 척 표정을 만들며
"이게 생각처럼 쉽게 맞아떨어지는 고부간이 얼마나 되겠어요? 그렇게 맞춰지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요. 그러니 잘 맞춰지지 않는다고 너무 서운해하지 마세요."라고 말씀드린다. 어머님은 잠시 어떤 생각에 잠기셨다가 나의 그런 반응이 밉지만은 않으셨는지
"그래, 네 말이 맞다. 내 자식하고도 아마 그렇게 딱 맞아떨어지진 않을 끼다."라고 답해 주신다. 예전 같았으면 어머님의 그런 말씀이 정말 서운하게만 느껴져서 아무런 대답도 않은 채 속으로만 속상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님과 함께 살아온 십수 년 세월의 더께 때문인지 이젠 그렇게 어물쩍어물쩍 웃음으로 넘기는 여유가 생긴다.

결혼해서 처음 얼마간은 조금이라도 서운한 말씀을 듣게 되면 겉으로 내색도 못한 채 심한 속앓이를 했었다. 워낙 바지런하시고 깔끔하신 시어머님의 눈에는 느릿느릿하고 어둔하게 보이는 며느리가 참으로 답답하셨을 것이고 그래서 나는 늘 한 말씀 듣기가 일쑤였다. 그럴 때면 억울하기도 하였으나 아직 새댁인 처지에 차마 뭐라고 변명하는 것조차 어려웠으니 그저 속으로만 그렇게 구시렁거리는 것으로 억울함을 해소했던 것 같다.

철없는 새댁 시절, 친정어머니께서 속상해하실 줄도 모르고 그런 시집살이를 미주알고주알 다 말씀드렸는데 그때마다 어머니는 무조건 잘못을 인정하고 "예"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옳다고 가르쳐 주셨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것이 잘 되지 않았다. 그렇잖아도 억울하다고 생각되는 일에는 자꾸 변명을 하고 싶어지는데 하물며 "예, 제 잘못입니다."라는 무조건적인 사죄를 드리기엔 께름칙한 속 좁음이 자꾸 고개를 내미는 것이었다. 하지만, 말대답 같은 변명이라도 할라치면 싸늘하게 맘을 닫고 돌아서시는 어머님을 몇 번 뵌 뒤로는 그 힘든 뒷감당보다는 차라리 사죄드리는 편이 내 신상에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차라리 여우가 되어 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님께서 무슨 영수증인가를 찾아오라고 하시는데 내가 금방 찾아내지 못하자
"쯧쯧, 젊은 사람이 왜 저리 정신이 없을꼬, 저러다 나이가 더 들면 도대체 어쩌려고 벌써 저러누..."라고 하시는데
"네, 어머님. 제가 정말 왜 이런지 모르겠어요. 이러다가 어머님 연세가 되면 일상생활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이네요. 그러고 보면 어머님은 정말 대단하세요. 완전 컴퓨터 시라니까요. 아마 시대를 잘 타고나셨으면 진즉 세상에 이름을 떨치셨을 텐데... 그렇죠?"라고 답해 드렸다. 내 잘못을 인정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머님의 기분까지 구름처럼 붕 띄워 드리는 놀라운 말솜씨를 발휘한 것이다.

여든의 어머님은 아직도 기억력이며, 계산력이 굉장히 뛰어나시다. 열둘이나 되는 손자 손녀들의 생일이나 조상님 제사 등도 절대 놓치지 않고 기억하고 계시고 심지어는 사돈인 내 동생 생일까지도 정확하게 기억을 하고 계신다. 그러니 깜빡깜빡 잘 잊고 사는 내게는 어머님의 그런 능력이 진심으로 대단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어머님은 예전과 달라진 넉살 좋은 내 모습을 보시더니 못마땅해하시던 표정을 완전히 거두시며 흐뭇한 미소까지 보내 주신다. 꾸지람하시려다가 오히려 기분이 좋아지신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어머님 대하기에 익숙해진 나는 점점 놀라운 변화를 해 나간다. 반찬이 맛없다 하시면
"전 왜 어머님처럼 안 되는지 모르겠어요. 앞으로는 어머님이 좀 해 주세요. 애비도, 아이들도 어머님 하신 것만 맛있다고 하니 할 수 없네요."라고 하면서 어머님 손맛을 치켜세워 드리고 당신 손으로 직접 반찬 만드시는 수고를 하시게끔 부려 먹는 얄미운 며느리가 된다. 그러나 그 수고를 하시는 어머님께서도 결코 힘들다 생각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쁘게 하시는 것 같다.

늘 일을 미리 하시고 준비성이 좋으신 어머님. 아무리 따라가려고 애써도 부족할 수밖에 없는 며느리는 차라리 게으름을 어머님께 자랑삼아 광고하자고 마음먹었다. 한번은 부엌을 좀 더 깨끗이 하라는 말씀에
"어머님. 저도 어머님만큼만, 아니 그 반만큼 만이라도 닮고 싶어요. 그런데 그렇게 타고나질 않은 제가 어머님 따라가려면 진이 다 빠져나갈 거예요. 그러니 좀 힘드시더라도 지금처럼 그렇게 제게 맞춰 주시고 절 참아 주셔요."라고 부탁 드렸다. 어머님을 잘 참아 주시는 좋은 분이라고 말씀드리면서 양보를 구하는 나의 지혜로움이 스스로 대견스럽기까지 했으니 정말 넉살이 많이도 좋아졌다. 그러자 어머님께서는
"그래, 나보다 니가 훨씬 낫다. 너 같은 성격이 차라리 좋지 싶다. 건강에도 더 좋고... 난 너무 예민하고 일에도 매여 살아서 이젠 병 밖에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라며 힘없이 말씀하신다.
"아니에요, 그래도 어머님이 그만큼 열심히 사신 덕분에 지금 이만큼이라도 일구신 거잖아요."
나도 고마움과 죄송함에 황급히 어머님을 위로해 드렸다.

얼마 전 셋째 형님(시누님)댁에 다녀오신 어머님께서 형님들과 함께 이런 말씀을 나누셨다고 했다. 여태껏 어머님이 희생으로 열심히 사신 그 복으로 좋은 며느리 보았다는 것이다. 나는 민망함과 양심에 찔리는 난처함에 차마 그대로 있지 못하고 얼른 다른 말로 화제를 바꾸며 허둥댔었다. 나는 어머님 기분만 좋으시면 언제나 꼬물꼬물 속에서 장난기가 발동해서 웃음을 선물해 드리고 싶어진다. 하지만, 몸이 편찮아 지셔서 우울해하시면 나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던 처세술도 빛을 잃고 초라해진다. 자칫 눈치 없이 행동하다 괜히 무안만 당하게 되기도 한다. 그래도 살아갈수록 그저 무던한 곰보다는 꾀부릴 줄도 아는 여우 같은 며느리가 고부관계를 보다 매끄럽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남편에게만 여우기질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시어머님께도 그런 여우 노릇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런 이유로 어머님께 남아 있는 나의 가장 큰 바람은 건강이다. 어깨가, 다리가, 허리가 아프셔서 진통제를 드시는 날이 조금이라도 줄어들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당신께 허락된 남아 있는 인생길을 고단하지 않게 걸어가실 수만 있다면 어수룩하기만 하던 며느리는 얼마든지 능수 능란한 고단수의 며느리 처세술로 어머님 마음을 녹아내리게 해 드릴 수 있으련만... 그러나 사실 알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자신을 고단수라고 생각하는 며느리. 그 위에는 그것을 알고도 모른 척 받아 주시는 더 고단수의 시어머님이 계실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