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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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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살이 젊은 줄을 몰랐다.


BY 선물 2003-08-07

일산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살았던 잠실에는 모 방송국 프로덕션이 있었다. 그 곳에는 아카데미가 개설되어 방송작가들을 모아 교육도 시켜 주었다. 당시 드라마작가가 꿈이었던 나는 비싼 수강료도,교육받을 시간에 대한 여유도 생각지 않고 그저 해보고 싶은 열정 하나로 대책없이 그 곳으로 향했다.
3분이면 나오는 즉석사진기에서 놀란 토끼 눈을 뜬 모습으로 찍혀 나온 내 낯선 얼굴을 이력서에 붙이고 어머님께는 장보러 간다는 말씀을 드리고 그렇게 홀린 듯 방송국으로 간 것이다. 시장 나오는 차림으로 수수하게 입고 나왔던 나의 눈에는 그 곳에 모인 작가지망생들의 모습이 너무도 현란해 보여서 괜시레 잔뜩 주눅이 들어 구석진 곳을 찾아야 했다.
모두들 자기소개서를 쓰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런 소개서는 처음이라 어떻게 서두를 풀어가야 하는지 곤혹스러움을 느끼며 다른 지망생들의 소개서를 곁눈질하며 몰래 훔쳐 보았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그 친구처럼 작가가 되려 합니다.'라는 글귀가 눈에 띄었다.
스물 셋정도로 보이는 앳띤 얼굴은 한껏 싱그러움을 뽐내듯 자신만만해 보였고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무언가를 계속 적어 내려 가고 있었다.
그 곳에서 아줌마는 나 혼자인 것 같았고 그래서인지 처음 먹었던 마음과는 달리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물론 자기 소개서에는 어떤 번뜩이는 글귀도 적지 못하고 그저 고리타분한 틀에 박힌 내용만을 적은 채 도망치듯 그 곳을 빠져 나왔다.난 이미 늦었다는 생각을 갖고...
결과는 너무나도 당연히 불합격이었다. 그러나 그 때 내가 그 경험을 통해 정작 배웠어야 할 것은 세상에 대한 겸손과 스스로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었는데  안타깝게도 현실에 대한 벽과 좌절만을 배우고 말았다. 결과가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몰래 시도했다는 것만을 유일한 위로로 생각하면서...
그 때 눈부신 젊음에 잔뜩 주눅들었던 나는 29살이었다. 그리고 십년이 흘렀다. 그동안 세상을 조금 더 보게 되고 더 알게 되었다. 흰머리 수는 늘었고 얼굴엔 잔주름도 제법 생기기 시작한다. 그동안 아가였던 아이들은 이제 청소년이 되어 한창 사춘기를 겪고 있다.
그런데... 나는 흘러간 10년동안 더 젊어져 가고 있었다. 사십대 아줌마도 알고 있는 조성모조차 몰랐던 내가 이젠 노래방엘 가서도 god의 랩 가사를 따라 흥얼거릴 수 있게 되었고
소심하고 겁많던 새댁에서 용감한 아줌마의 모습으로 변해 가며 오히려 젊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컴맹이라는 이야기만 나오면 `저건 내이야기야!'했던 내가 이젠 제법 인터넷 바다를 유유하게 헤엄치며 사람들과의 사이버상의 만남도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10년전에는 절망했으나 지금은 바닥을 치고 올라온 그 힘을 갖고 오래된 숙제를 끄집어내듯 그렇게 조금씩 꿈을 꾸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10년만 젊었더라면..
20년만 젊었더라면...
나에게는 그렇게 시간을 구걸할 여유가 별로 없다. 아니,오히려 돌아본 그 때의 젊음은 결코 지금보다 파닥거리는 열정이 없었음을 느끼게 된다. 앞으로의 남아있는 나의 생에서 나는 지금 이 순간 가장 젊은 시간을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돌아보지 말고 지금 이순간에 전념하고 악착같은 맘으로 최선을 다해야겠다. 꿈을 가지고 있는 한 스스로 젊은줄을 몰랐던 내 스물아홉보다 지금의 내가 차라리 자랑스런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