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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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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사랑하다


BY 선물 2003-07-18

1)

"에그머니,망측도 해라.이구,더러워라."
어머님이 텔레비젼을 보시다가 갑자기 화들짝 놀란 모습으로 계속 못 볼 것을 보신 것처럼 말씀하신다.
밖에서 보고 있던 신문을 접고 무슨 일이신가 싶어 안방으로 들어갔다.
"에미야,저거 좀 봐라.세상에 다 늙은 것들이 뽀뽀를 하고 난리다."
어머님께서 보시던 프로그램이 아마 노인분들 새롭게 인생을 출발하게 해주는 일종의 짝짓기 프로그램인 듯 하다.
어머님은 충격을 입으신 것처럼 흥분하신다.
"자식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은가 보다.다 늙은 영감탱이 뒷수발이나 할라고 저렇게도 좋아할까!
난 죽어도 저리는 못하지 싶은데..."
어머님은 노인분들의 애정표현을 더럽다고 생각하신다.그리고 여자는 혼자 사는게 제일 좋은거라고 하시며
늙어서 결혼하면 냄새나는 남자 수발밖에 할 것이 없다고 잘라 말씀하신다.
신랑 얼굴도 못보고 결혼해서 남녀간의 애틋한 감정 한 번 못 느껴보신 우리 어머님.
19세 꽃다운 나이에 눈물로 시작하신 결혼생활.
아마도 어머님은 당신의 결혼생활을 생각하면 끝이 없는 회한에 사로 잡히실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도 남자에 대해 부정적이기만 하신 어머님도 가끔은 사랑을 꿈꾸신다.
여자로 태어나 평생 남자의 사랑이라곤 받아보신 적이 없으신 것이 참으로 한스러우신 것 같다.
그래서 이 생에서의 어떤 구체적인 사랑을 꿈꾸시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막연히 언젠가 다시 생이 허락된다면
남녀간의 애틋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해보고 싶은,그런 꿈을 꾸시는 것이다.

(2)

남편과 유부남,유부녀의 결코 아름답지 못한 사랑이야기가 줄거리인 드라마를 보다가 나는 느닷없이 `바람'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어졌다.
"여보!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결혼을 해서 잘 살고 있고 또 특별히 잘못된 가치관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닌데,
어느날 우연찮게 자신의 의지로도 어쩌지 못하는 그런 불같은 사랑이 찾아오면 그런 때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정말 자기 스스로도 도무지 조절 안 될 정도의 사랑이 찾아오면 생각처럼 그렇게 쉽게 이성적으로
잘 극복할 수 있을까요? 그런 때 사랑을 선택하면 소위 바람피는 것이 되는데 왜 그런지 바람이라는 이름
하나로 그 감정을 매도해 버리기엔 좀 잔인하다 싶은데.."
남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창 밖은 깜깜한 어둠으로 둘러싸여 있고 어둠이 주는 묘한 분위기 때문인지
남편도 시시한 삼류소설같은 이야기로 생각지 않고 조금씩 진지한 표정이 되어갔다.
"참 어려운 문제겠지.그래도 그런 상황이라면 조금은 이해될 여지가 있지 않을까?"
제법 보수적인 남편인데 내 생각에 선뜻 수긍을 한다.
"그래요. 하지만 이해할 수는 있다고 해도 다 용서되는 것은 아닐거예요.내 생각엔 그런 감정을 느끼는 선까지는
아무리 부부간이라도 강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 선을 넘어서서는 안되는 것이 부부간의 책임이고 서로에게 지워진 성실한 약속이행일거 같아요."
우리 부부는 그 쯤에서 이야기를 끝냈던 것 같다.
나는 나의 남편에 대한 사랑에 늘 떳떳하다.결혼 후에는 정말 신기하게도 남편 아닌 어떤 남자도 내겐 더이상 남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남편에 대한 그 사랑은 어느새 나를 사랑하는 자기애와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남편의 아픔,고독,기쁨,행복 그런 것이 내게도 똑같이 느껴지니 남편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곧 나를 사랑하는 맘과 같아진다.
그래서 설레임이나 짜릿함은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엔 정말 곰삭은 정이 가득하다.


(3)

사랑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참으로 사람이 유치해진다고 느껴진다.
하늘에 두둥실 떠다니는 구름도 하트모양으로 보이고 비가 오면 비가,눈이 오면 눈이,또 햇살은 햇살대로,
어둠은 어둠대로 모두가 다 내 사랑을 위한 하나의 장치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진다.사랑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왜 바닷가를 맨발로 이유도 없이 뛰어 다니며 잡지도 않을 잡기놀이를 하는지,나무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얼굴을 숨겼다가 다시 내놓았다가 하며 장난 아닌 장난을 치는지,
왜 전화벨소리만 나도 가슴이 울렁이며 유행가가사를 들으면 다 내 이야기처럼 들리는지를 사랑을 겪어보니
다 알 것 같았다.
어깨와 어깨만 스쳐도 몸이 붕 뜨는 것처럼 짜릿하고 아주 잠깐동안의 이별에도 가슴 아려하고 상대방의 조그만 무심함에도 가슴 철렁 절망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나는 분명 사랑을 해 보았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랑은 참으로 짧고 허무했다.어제같이 뜨겁게 끓어 오르던 마음도 이빨사이에 끼인 빨간 고추가루 하나에 어이없이 사라지는 사랑도 있고
마음을 주고 받던 상대가 어느날 손 한 번 잡으려고 한 것만으로 나는 엉뚱하게도 징그럽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결국은 상대가 영문도 모른 채 졸지간에 이별을 당한 그런 사랑도 있었다.그럼에도 그 사랑이 사랑이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으리라.
내가 기실 사랑이라고 알고 있었던 그 사랑은 사랑아닌 잠깐 끓어오른 열정이었으리라.


(4)

어머님과 나는 나란히 앉아서 드라마 보기를 즐긴다.드라마에 대해 이런 저런 의견도 교환하면서..
가끔 아주 괜찮은 연인이 나와서 아주 가슴 시린 절절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보게 되는데
그런 때에는 또 정말 괜찮은 음악이 흘러나오며 마음을 아릿하게 만든다.
고부간에 나란히 앉아서 텔레비젼을 보는데 일흔 여덟의 시어머님과 서른 아홉의 며느리의 눈빛이 꼭 닮아 있다.
그것은 사랑을 꿈꾸는 눈빛이다.
남자에 대한 어떤 애착도 갖고 계시지 않는 어머님.
그리고 지금 이 나이에 구체적인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바람날 맘을 갖지 않는 한,그런 부끄러움에서 자유로운 며느리는
한 자리에 앉아서 몽롱해지고 있다.
사랑이라곤 경험해보지 못하셨다는 어머님도 사랑을 알고 또 온 마음으로 느끼고 계신다.
드라마의 주인공들의 눈빛을 보고 또 슬픈 음악을 들으니 참 아름답고도 가슴아파온다고 하신다.
그런 사랑을 못해본 어머님의 한 생이 여자로서 한스럽다 하신다.
`그래요.어머님.그게 사랑이지요.사랑은 참 아름다운거지요.어머님도 사랑을 아시는군요'
나 또한 주인공의 사랑에 녹아들며 똑같이 가슴앓이하고 빠져든다.
그러면서 생각한다.사랑을 하고 싶다.사랑을 하고 싶다.

어머님과 내가 한 맘으로 원하는 것은 사람에 대한 사랑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사랑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랑을 사랑하는 한, 머리 하얀 할머니와 마흔을 코 앞에 둔 나는 언제나 여자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