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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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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맑은 사랑에 난 그저 고맙기만 하다.


BY 선물 2003-07-16


(1)

그 아이를 떠올리면 몇가지 기억만 선명할 뿐,그 기억외에는 이상하다싶을만큼 떠오르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선명하게 남아있는 그 기억은 너무나도 또렷해서 쉽게 잊혀지질 않고 오래도록 기억창고에서 머물러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 아이를 처음 만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억도 없으니 제가 그리 관심을 두었던 아이는 아니었겠지요.

그 때는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였습니다..
저는 6학년 2학기를 맞으며 전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졸업장을 갖게 됨으로써 평생 그 학교 출신이라고 되어 있는
학교는 실상 반년의 제 학창생활의 흔적일 뿐이랍니다.
저는 6학년 4반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학교에 갔는데 칠판에 제 이름과 전교회장이었던 저희반 반장아이 이름이 크게 적혀 있고
그 두이름사이에는 하트모양이 커다랗게 그려져 있었습니다.
곱상하게 생겨서 색시란 별명을 가졌던 반장아이는 그냥 얼굴만 발개져서 화를 내었고
저는 칠판앞으로 성큼 걸어 나가서 지우개로 있는 힘을 다해 흔적도 남기지 않고 그 낙서를 지웠습니다.
물론 그 때 여학생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었던 반장아이를 저도 좋아하는 맘을 가지고 있었을 터였지만
왠지 그 낙서에는 진짜로 화가 났던 것 같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옆 반의 어떤 남자아이가 아침에 와서 그렇게 적어놓았다며 귀띔을 해주었는데
그 때 가서 그 아이를 확인했던 것이 제가 기억하는 그 아이에 대한 첫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아이 이름을 듣고 누구인지 알았던 것으로 보아 첫만남은 그 전에 있었을 터이지요.
그 아이에 대한 두번째 기억은 돌멩이 사건입니다.
하교길에 친구들과 함께 재잘대며 걸어가는데 그 아이가 뒤에서 절 불렀습니다.
별로 대꾸도 않고 새초롬하게 쳐다보곤 걸어가는데 옆에 있던 짖궂은 친구 하나가 그 아이에게
뭐라고 놀렸던 것 같습니다.
제 뒤에 따라 오던 그 아이는 땅바닥에 떨어져 있던 작은 돌멩이 하나를 주워서 던졌고,
그 돌멩이는 저희 있던 곳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날라 가서 엉뚱한 다른 여자아이 머리에 맞았지요.
아마 그 아이는 저희에게 돌멩이를 맞힐 마음은 전혀 없었고 그저 짖궂은 장난기가 발동해서 돌던지는 시늉만 하려 했던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돌멩이를 맞고 주저 앉은 여자아이의 머리에선 너무도 선명한 선홍색 피가 보였고
피에 대해 막연한 공포심을 갖고 있던 저는 그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어 뒤돌아서 집을 향해 뛰어갔습니다.
하지만 잠깐 보았던 그 남자아이의 불안스레 떨리던 눈빛은 저로 하여금 큰 마음의 빚을 지게 하였고 오래도록 저를 자유롭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 돌멩이 사건 뒤로는 자꾸만 그 아이앞에만 가면 가슴이 쿵쾅거리고 마치 같이 죄를 지은 공범인 제가 그아일 배신한듯한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돌멩이사건이 어떻게 마무리 되었는지에 대한 기억은 제게 백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 뒤로 중학교에 입학한 후로는 다시는 서로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야 그 아이와 전 많이 변한 모습으로 서로를 잠시 스쳐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성당과 이웃성당의 고등부 주일학교학생들간에 배구친목대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남녀학생이 함께 한 팀을 이뤄 네트 건너편의 이웃성당팀과 시합을 겨루게 되었는데 저 쪽 건너편 네트에서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얼굴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 때 돌멩이를 던졌던그 남자아이였습니다.
어느 팀이 이겼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시합이 끝난 뒤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말을 걸어올 줄 알았던 그 아이는
오히려 저를 슬금슬금 피하고 어느결에 제 눈앞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모르지만 전 맘이 서운해졌습니다.왠지 잠깐 마주친 눈빛이 서늘하게 맘에 남아 아릿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뒤로 저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했고 그때 본 것이 제게 남아 있는 그 아이에 대한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2)

백화점에서 무료로 인터넷교육을 해 준다는 광고지를 보고 젊은 엄마로써 컴맹에서는 탈출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백화점에 가서 교육신청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간단한 기본 적인 것들만 배웠는데 아무 것도 모르던 제겐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는 인터넷세상이었습니다.
남들이 이메일로 편지를 주고 받는다고 할 때 옆에서 듣고만 있던 전 그 사람들을 얼마나 대단하게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런 제게 이메일뿐만 아니라 여러 사이트에 들어가서 사람들 만나는 것도 배우고 검색하는 법도 배우게 되니 그 교육을 받는동안 마치 별천지를 발견한 것처럼 신나는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 때 가르치던 선생님 지시대로 들어가서 만든 메일주소가 야후의 gemma651205였습니다.
나중에 친구에게서 아줌마티 팍팍내냐고 핀잔을 들었던 제 생년월일이 그대로 드러난 메일주소이지요.
전 그게 뭐 어떠냐하며 대수롭게 생각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뒤로 만든 메일에서는 숫자를 좀 줄여서 사용했습니다.
그 때가 4년 전이었는데 당시에는 동창찾기 사이트가 유행이었고 제가 국내 최대 동창찾기 사이트에 가입했을 때는 이미 많은 친구들이 가입해 있었습니다.
그 사이트에서 그 남자아이 이름을 발견했습니다.
그래도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고 조금은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가입한 지 하루만에 그 아이에게서 메일이 왔습니다.
그 메일을 보자마자 무슨 죄 짓다가 들킨 사람처럼 깜짝 놀라서 한 번만 읽고 마치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단숨에 삭제를 해버렸습니다.
내용은 문제 될 것이 없었지만 어쨌든 남자한테 편지가 왔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남편에게 죄를 지은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삭제를 해서 영원히 사라진 메일이지만 그 내용은 그대로 기억속에 저장이 되었습니다.
그 메일 속에서는 뜻밖에도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 아이와 저 사이에 있었던 일이 많았습니다.
그 아이는 저희 집이 골목안 두 번째 파란 대문을 가진 집이었고 문패에서 본 저희 아버지 함자도 정확하게
기억했으며 저희 집까지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저희 가족들을 다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 아이의 기억은 아주 정확해서 저도 `아하!그랬었지!'하며 다시 기억을 떠올릴만 한데도 희한하게 전 그 부분에 대해서 하나도 기억을 못해냈습니다.
그러나 제가 갖고 있는 몇 안되는 기억에 대해서 그 아이는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세세하게 설명을 해 놓았습니다.
돌멩이를 맞은 여학생은 병원으로 가서 치료해서 나았지만 그 아이에겐 큰 충격을 주었던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 일에 관해서도 저에 대한 원망은 전혀 없고 제 옆에 있던 친구들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배구시합때는 자신의 처지가 제 앞에 나설 수 없을만큼 초라했던 때였다고 했습니다.
부모님이 너무 일찍 돌아가셔서 그 충격으로 공부도 제대로 못하고 고등학교도 야간고등학교에 가게 되었고
정말 힘들고 가난하게 지내고 있을 때라 저를 만나 반가웠지만 말한마디 붙이지 못하고 그대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고 했습니다.전 갑자기 그 당시 제게 보내온 두 통의 발신자불명의 편지가 생각났습니다.
이름은 적어 놓았는데 그게 자신의 본명이 아니라면서 자기 이름을 적기조차 너무 부끄럽다며 저보고 공부 열심히하며 잘 지내길 바란다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떠올랐을 뿐 그 것을 확인해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 뒤로도 그 아이는 저를 두 번인가 더 보았다고 합니다.
방학때,그리고 대학생이 된 뒤로도 제가 대구에 내려간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 때 먼발치에서 저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 때는 왜 저를 아는 척 하지 않았는지 궁금했지만 그런 내용까지는 적어 놓질 않았습니다.
제가 어느 학교에 입학했는지도 알고 있었고 제 결혼까지도 그 아이는 알고 있었습니다.
아마 친구들에게서 이리저리 제 이야기를 주워 들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도 자신의 처지랑 비슷한 여자를 만나 결혼하게 되고 아이도 낳아 기르게 되면서 자신의 삶을 꾸려가야했기에
저에 대한 소식은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 아이도 인터넷에서 동창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저를 찾기 위해 사람을 찾을 수 있는 사이트란 사이트에는 모두 가입을 해서
매일같이 검색을 하였는데 이제서야 제 이름을 발견했다며 아주 길고 긴 내용의 글을 담아 보냈습니다.
저는 답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많이 망설였습니다.
한가지는 꼭 이야기 해 주고 싶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어린 아이였을 때 자신이 던진 돌멩이에 여자아이가 피흘리며 울고 있는데 어쩔 줄 몰라하며 절 애타게 바라보던 그 눈빛을 나몰라라하고 혼자 도망갔던 그 일에 대한 마음의 빚을 갚기 위해
미안했다는 그 말을 꼭 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글에서 볼 수 있었던 그 아이의 고단한 삶이 이젠 정말 행복으로 채워지기를 바란다고 기원해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생각이 많고 덜 순수해진 전 겁이 많아 결국은 아무 답도 하질 않았습니다.
그 아이에게선 몇 번 더 메일이 왔습니다.
저는 삭제를 하다가 결국에는 답장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도 했고 그아이의 생이 행복하기 바란다는 기원도 해 주었습니다.그러면서 훗날,그 어느날인가에 우리나이가 남자도 여자도 아닌 그런 때가 오면 지나간 이야기도 하며 편하게 만나자고 적었습니다.그 때 동창회를 열면 호호할머니가 되어서라도 나가겠다고 하며 그대신 이젠 이쯤에서 추억으로만 간직해달라고 했습니다.
그 답장을 보낸 뒤로 딱 한 번 더 그 아이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제 메일주소에 있는 생일날, 축하한다는 내용과 함께 조용하고 선한 눈빛을 가진 소녀를 영원히 간직하겠다면서 더 이상의 연락은 없을 것이고,노인이 되어 만날 날을 기다리겠다고 했습니다.


(3)

생일축하메일을 받은 뒤로 3년이 지났지만 저는 다시는 그아이의 글을 접하지 못했습니다.
30년이 지나도 그 아이의 글을 만나지 않고 싶습니다.
70할머니가 되어 그 아이와의 만남이 그 누구에게도 이상한 생각이 안 들 수 있는 때가 온다도 해도
전 그 아이 앞에는 나서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나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조용하고 선한 눈빛을 가진 소녀는 저로 인해 만들어진 이미지라 해도 그 것은 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맑은 마음을 가졌던 소년만이 그려낼 수 있는 그아이만의 소녀이기 때문입니다.
전 그 때 이미 영악해지기 시작한 아이였고 그 아이의 글 속에 있는 그런 착한 아이의 맑은 눈빛은 어떤 억지로도 제게갖다 붙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는 저를 만나는 순간 작은 반가움과는 비교도 안 될만큼 큰 상실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 아이만의 그 소녀는 그 아이가 저를 본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임을 제가 너무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정말로 그 아이가 많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의 아픔은 제 가슴에 자리를 잡고 좀처럼 비켜나질 않습니다.
그러나,그 아픔이 사라졌다는 것을 아는 그 순간이 되면 조심조심 그 누군가를 완전히 떠밀어 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