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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의 일생 (마지막 편) -- 집앞 부두에서 내 인생 처음으로 자살을 꿈꾸었다 --


BY 박 라일락 2003-07-20

 

-- 집 앞 부두에서 내 인생 처음으로 자살을 꿈꾸었다...  --

 


 
이른 새벽 호텔 온천탕은 아무도 찾지 않았고
내가 제일 먼저 온 첫 손님이 되었다.
넓은 탕 가득 채우진 온천 수..
지친 나의 육신을 뜨거운 탕 속에 아무 생각없이 맡겨 버렸다.
뜨거운 김 살 속에는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지난날의 나의 괴롭고 힘들었던 과거가 한 편의 흑백영상이 되어
물 안개처럼 아련히 피어오른다.

그 사람 보냈고 첫 시련은 나의 왼쪽 다리를 너무 크게 다쳤던 사건이다.
그 전날 어판장에서 멸치 잡은 어선이 입항하였는데
현장 인부들이 청소를 깨끗이 하지 않아서
어판장 內가 억수로 미끄러웠던 것이 원인이 되어서...
입찰 응하려고 급하게 쫓아가던 내가 돌 뿌리에 채여서
앞으로 엎어지면서 크게 다쳤고 곧 장 병원에 실려 갔었다
그리고 왼쪽 무릎이 5cm넘게 금이 나서 부러지고 왼쪽 다리 전체를 깁스를 했었다.
병원에 한 달을 입원하라고 의사가 간곡히 권했지만
그럴 수 없는 나의 입장을 밝히고 의사에게 사정을 했다.
중매인 자격을 인준받고 이제 겨우 2개월째.
그 사람 보내면서 많은 공백기간을 비웠는데 또 그럴 수는 없기에..
줄어진 고객들을 다시 채우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고 있었던가.
그런데 또다시 한 달을 병원에서 보낸다면..
'아니야. 그건 절대 그럴 수 없어.
나의 業을 이렇게 쫑 칠 수 없잖아.
이젠 죽어도 어판장에서 죽어야 하는 거야'
우리 식구 모두를 누가 책임을 저 줄 것인가...?
깁스한 다리를 찔찔 끌면서 긴 50일간을 너무 힘들게 일을 했다.
그리고 판매과도 나의 가련한 마음을 읽었고
좀 늦게 움직이는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경매에 들어갔었다.

엎친 곳에 또 덮친다고 했던가.
비극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큰댁이 소유한 많은 건물 중에 시내 중심가 삼덕동 큰 기와집.
그 당시 1천 1백만원에 전세로 우리 아이들이 3년 넘게 있으면서 학교에 다녔다.
그런데 시숙님 회사(지금은 부도가 났지만 그 당시 재벌인 D건설의 이사로 있었음)에
계실 때 빌딩을 새워야 한다고 이 추운 한 겨울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라고 하네....
휴~~~유. 참!
이 추운 한 겨울에 꼭 빌딩을 지어 올려야 하는 큰댁의 그 심보!
그 날 그 전화를 받는 그 순간.
나는 완전히 이성을 망각하였고 정신이 나간 상태로 미쳐 버렸다.
그리고 이미 도마 위에서 난도질 당할 한 마리의 생선이 되어
최후의 발악으로 큰 댁 형님에게 내 마지막 울분과 한을 풀었다.
"보소! 형님.
말 씀 다 하셨는가요?
뭐라고요?
이 추운 엄동 설한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라고요?
그 자리에 빌딩을 한 겨울 추운 지금에 꼭 지어 올려야 하나요?
지네 아버지 죽은지 2달 밖에 안된 갸 들에게
큰아버지 큰 엄마로써 이렇게 잔인 할 수 있습니까?
형님.
우리가 형님 댁에 눌러 앉을까 봐 억수로 겁나지요?
하지만 그 건 형님이 오해하고 있지요.
오늘 살다가 내일 죽는 한이 있어도
큰댁에 아이들 쪽박 채워서 동냥 보내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곤란하네요.
형님이 우리 돈 가지고 있는 1천1백만원을 아이들에게 주고 길거리로 내몰던지
삯을 셋 방을 얻어서 내보던지 말던지....,
우리 아이들 당신네 집안의 朴씨성을 가졌으니
그도 저도 안 되거들랑 어느 고아원에 데리고 가서 넣어 버리세요"
그리고 그 날 밤.
아픈 다리를 이끌고 바다가 바로 앞인 집 앞 부두에서 내 인생 처음으로 자살을 꿈꾸었다.
정말 그 냥 죽고 싶어서....
모진 생명에 매 달려 있던 자식 땜에 죽지는 못했지만.....

사촌형제들의 나무람과 남의 이목으로
큰댁은 우리가 맡겨 둔 1천1백만원에서 6백만원 더 보태서
시내 외각에 2층 한 층 전세를 얻어서 우리 아이들을 내몰았다..
그 추운 동지 섣달 한 겨울에....
그리고 맏이는 살고 있는 동쪽끝에서 서쪽끝에 있는 학교를
너무 힘들게 통학을 하면서 고생 끝에 졸업을 했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살았던 큰댁은 겨울에 내내 비워 두었고
늦은 봄에 기초를 하더니 여름 가을을 보내고
그 해 초 겨울에 5층 빌딩을 세워서 지금도 세을 받고 있는 줄 안다.
라일락 인생 처음으로 큰댁에 받은 그 6백만원 혜택...
이제 것 남의 돈을 처음이고 마지막으로 꿀꺽 삼킨 셈이다.
그 뒤 형편이 나아저서 갚을 정도가 되었고 큰댁에 갚겠다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 사는 것과 하늘과 땅보다 더 차이가 난 큰댁은
조카들에게 배 풀어 준 마지막 돈이니
더 도 덜 도 생각을 말고 갚지 마라고 선심을 쓴 샘이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세월이 약이되어 나를 큰댁을 이해하도록 하였다.
그래도 우리 아이들은 큰댁을 지금도 잘 가지 않고,
그 때의 받은 상처와 서운함을 평생 큰 흔적으로 남을 것이라고 한다.
지금도 시아버님 제사 때가면 시숙님은 기도문에서 두 제수씨가
다른 정지 밟지 않고 朴씨 문중에 남아 주어서 감사하다는 표현으로
축복받으라고 기도 하여주신다.......
글쎄다.
축복 받을 만큼 진정 잘 살아 온 내 인생인가........? 쩝.
지금 와서 생각하면 도리어 나 자신이 좀 싱겁고 웃기는 중생이다.
자기 재산가지고,
재혼 할 까 봐 두려운 제수씨에게 보증 안 쓸 수도 있는 문제이고,
또 아무리 부자이지만 조카 자식에게 나눔이 싫어서 안 주면 그만이지 무슨 이유가 있는가..
하지만 좁은 아녀자의 생각은
그 당시 교회에는 서슴없이 몇 백만원을 자기들 가족들 축복받기 위하여 헌금하면서
어렵게 공부하는 조카들에게 땡 전 십 원 한푼도 보조 안 해주는
큰댁이 얼마나 야속하고 무심하던지....

그러나 언제나 괴로움만 나에게 있은 것은 아니다.
물론 남자 동료들에게 구입 물건과 고객이 많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해서
심한 논쟁이 몇 번이나 있었고,
그 때마다 수협에 호소문을 제출하여 억울함을 보호 받기도 하였고,
여자라고 기죽지 않으려고 정말 노력했고 안간힘을 다했다.
그리고 어판장의 생활이 점점 안전권에 돌입하였다.
또 남자 동료들과 어울려서 친해지면서
여행을 다닐 때는 홍일점인 내가 너무 과한 대접을 받았고,
지금도 선배나 후배동료가 여자라고 감히 무시하는 그런 일은 절대 없다.
물량 구입도 20명이 넘는 동료 중에서 해 마다 선두권 대열에 우뚝 서 있었다.
그리고 외지에서 오시는 첫 고객은 주로 여자인 나에게 물건 구입 의뢰를 많이 한다.
자기들 말에 의하면,
소문으로 여자인 내가 상세하고 치밀하게 물건 구입을 잘 해준다나.... 
남들은  믿거나 말거나 이지만.
그리고 세월을 붙잡아 매지 못함에 한 뇨자의 젊음인 청춘은 덧 없이 흘러 갔었다.
아이들이 미성년에서 벗어나는 그 해에,
주택을 내 앞으로 이전했고 수협 보증담보설정도 현금에서 주택으로 대체를 하였다.
물론 친구에게 빌린 돈은 그 전에 다 갚았다.
친구는 죽어도 이자는 받지 않는다고 해서 본의 아니게 본전만 갚았다.
친정에서 은행 대출로 빌러 온 돈도 마지막 다 갚았고...
다시 또 새로운 모험에 도전했다.
바로 우리 집과 붙어 있는 큰길의 횟집을 덜컹 구입하기로 계약을 했고
또다시 1억원이 훨씬 넘는 자금 문제로 고민에 빠졌다.
그 횟집은 그 사람 살아 있을 때.
불과 몇 천만윈의 시세로 경매로 넘어갔는데
그 사람보고 이 집을 사서 합방을 해야지 우리 집 가치가 있다고
누누이 설명을 하고 경매장에 보냈는데 포기하고 입찰에도 응하지 않고 돌아왔으니...
그 사람은 부동산 투기는 절대 하지 않았고
현금에 여념하였으니 패세된 경제론을 가진 사람이었다.
만일에 그 때 그 집을 사서 가진 돈이 없었더라면
자기가 예약된 죽음이 오지 않을 것인데 하고...나의 쓸데 없는 생각도 많이 했다.
두 번째로 친정과 나의 女高 친구 도움을 또 받았다.
물론 아무런 조건 없이....
그 돈을 빌리고 얼마 되지 않은 짧은 기간에 친정 돈과 친구 돈을 이내 쉽게 갚았다.
나의 눈물과 고생한 노동의 댓가로....
어쩜 40대 초반의 젊은 뇨자가 아름다운 청춘과 맞 바꾸었는 댓가로......
친정댁이야 동생이고 시누이지만,
(얼케 언니에게 좀 미안했지만, 내가 넘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재산 상속을 그 당시 오빠가 다 받았기에 친정 오빠에게 빌려 옴은 나로선 좀 당당했다.)
여고 친구는 두고 두고 감사하는 마음의 빚을 진 샘이다.
지금도 그 여고 동기와는 입안에 있는 밥을 나누어 먹을 정도로 막연하게 지낸다.

그리고 밤 낮을 가리지 않고 옆도 돌아보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횟집도 인력을 많이 쓰지 않고 내 손으로 주방에서 일을 참 많이도 했다.
횟집을 오픈하면서 공부 하기 힘든 늦은 나이에도 요리사 자격증을
남보다 쉽게 한번도 실패없이 획득했으니 얼마나 이를 악 물고 했던가...
3만원짜리 회 한 접시를 팔기 위해서 꼭 박 밤을 세운적도 허다했으니깐...
새벽 일 마치고 대 게를 많이 구입해서 내 손으로 직접 운전하여
대구 큰 외식집 몇 군데 납품을 하였고.....
또 직접 어판장에서 구입한 자연산 횟감으로 손님들을 맞이하였기에
옆집 큰 건물의 횟집 보다 늘 우리 가게에 손님이 많았다.
6년을 죽으라고 일을 했더니 예전에 다쳤던 다리가 재발하여
무릎 관절로 고생문을 열기 시작하여
서울 경희 의료원에 만 2년 넘게 매 달 치료하러 다녔다.
지금은 많이 좋아 진 상태이지만......
또 가슴에 작은 암이란 덩어리로 우리 아이들을 초 긴장감의 소용돌이로 몰아 넣었다.
그리고 일 년 넘게 대구 종합 병원에 매 달 정기 검사를 다녔다.
헌데 더 발전되지 않고 그 냥 정지 된 상태라고
병원에서 큰 걱정을 하지 안아도 된다고 했기에 또 한 숨을 놓았다.
강구 항 시내에서 죽을 고생으로 횟집 운영을 6년 한 덕택에
시외에 주차장이 넓은 동해안을 낀 7번 국도 변인 지금의 이 자리에 가게를 옮겨 올 수 있었다.
그리고 딸 아이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어미에게 금전적 도움을 한 푼도 주지 못하고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자기들 짝을 만나서 민들레 홀씨되어 날아 가 버렸다.
그리고 지금 아들 현이와 지 배필인 美敬이가 내 곁에서 같이하고 있지 않는가...
솔직히 말해서 아들의 그 女는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다.
내가진 패물도 내 딸에겐 주지 않았지만, 그 女가 원하면 아무런 아까움 없이 주었다.
한치의 거짓이 없이 지금도 딸처럼 느껴진다.

아들 부부는 3층 주택에서 살고 어미인 나는 가게 1층의 방 한 칸에서 오순도순 살고 있는데..
한번은 아들 현이가 어미 속을 너무 상하게 하기에 살림 나가서 살아라고 굿판이 벌어졌다.
아들의 女子가 죽어도 살림을 못 나가겠단다.
그 女가 자기 시어미에게 하는 말이 더 가관이다.
"어머니. 우리가 왜? 살림을 나가지요?
우리는 꾀 없나요?
어머님이 이렇게 크고 좋은 환경을 만들어서 우리에게 주는데
뭣 땜 시 나가서 고생을 합니까?
어머님. 창현씨는 확 무시해버리고 저하고 살면 되지요...
아들만 쫓아내세요.
저는 죽어도 어머니하고 살렵니다"
하하 하하하....
그 날.
그 女의 말 한마디로 전쟁은 쫑 쳤고 무기여 잘 있거라가 되어 버렸지만...

집 나와서 하루 밤을 더 천식으로 앓고 있던 언니 곁에서 옛 날 얘기를 하면서 보냈다.
그리고 그 이튿날.
나를 도와준 女高 동기를 만났다.
그 친구 미리 약속한 타임이 있었는데 다 포기하고
또 친한 다른 친구들을 데리고 나를 위로한다고
약속 시간보다 더 먼저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우린 팔공산 갓 바위가 있는 우아한 레스토랑으로 장소를 옮겼고
지치고 피곤한 나의 정신과 육체의 우울함을 기분 전환 시켜 주었다.

밤늦게까지 벗 들과 놀다가 언니 집으로 돌아오니
아들 현이가 자기 형(이질)에게 연락을 받고 어미 있는 곳 알고
이 어미를 모시로 왔다면서 석고 대죄를 한다고 꿇어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미친 넘!
"야 이 넘아! 너희들 끼리 잘 살고 잘 해 봐라.
이 어미는 이미 마음 비웠고 푹 쉬었다가 갈 것이다.
이젠 나도 죽을 힘내서 일하고 싶지 않다.
이제 것 죽기 살기로 일 한 것도 너무 억울하다.
그리고 잘 먹고 좀 쓰면서 살란다"하고 고집을 부렸지만
지난 일은 무조건 잘 못했으니 집으로 돌아가서 어떤 벌을 주어도 달게 받겠다나..
그리고 늙고 병들어 고생하는 언니도 사랑하는 동생에게
못 이기는 척하고 집으로 돌라가라고 권하니.........쩝.
그리고 언니는 조카를 눈도 못 뜨고 눈물이 쑥 나오도록 혼 줄을 내주었고
아들 넘의 이질 형도 동생에게 효도의 원칙을 설명하면서 재차 타일렀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승용차안에서 두 母子는 아무런 대화가 없었다.
그래도 둘이만이 통하는 마음과 마음에서 어미는 아들을 이미 용서했고...
아들은 지어미가 자식인 자기를 더 이상 꾸중하지 않고 용서했음을 인식하였으리라..
다만 부모 자식사이에서 맺어진 천륜이란 허울은
저 세상 갈 때까지 벗어나지 못함을 깨달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