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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의 일생 (4편)-- 오늘을 살다가 내일 마른 땅에 머리를 박고 죽을망정 --


BY 박 라일락 2003-07-20

 

-오늘을 살다가 내일 마른 땅에 머리를 박고 죽을망정.... -


 
"혼자 투숙하시려고요?"
"예."
이미 산에서 내려 올 때 땅거미는 긴 그림자를 지었다.
이른봄이라서 그런지 오후 7시경쯤 이었던가 싶은데...
그 사람 머물고 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석정 온천 호텔이 있었다.
그 곳에 숙소를 정하였고 마음의 짐을 풀었다.
입은 옷 위에 바바리 하나 걸치고 손가방하나 달랑 들고 나왔으니
더 이상 풀어야 할 여장도 없었던 것이다.
곧 온천 수에 하루의 지친 육신을 담갔고,
열 받아 달아올랐던 마음의 피로도 따끈한 온천 수에서 녹았다.
밤 10시 까지 한다는 온천 목욕탕은 벌 써 손님들이 거의 빠져나가고
몇몇만 있었는데 아마 나처럼 투숙객인 것 같았다.
객실에 일찍 올라 가 봐야 잠만 자면 될 텐데 ..싶어서
마칠 때가지 온천 수에 오래 동안 머물었다..
오늘 하루의 일기를 머리 속에서 쓰고 있으니 자꾸만 눈물이 나오네.

계획에도 없었던 여행!
솔직히 말해서 누구와의 약속으로 여행을 떠나려고 하면
어판장의 새벽 일, 가게 일 땜에 몇 번이나 생각하고 그리고 주저앉고..
그래 맞아. 맞다.
내가 나에게 주어진 값진 휴가이다.
나라고 천날 만날 일만 하다가 죽으란 법 없지 않는가.
이젠 나도 쉴 수 있는 권리가 당연히 있은 거야.
온천 수 뿌연 김 살 속에서 내 지난 과거사의 한편인...
삼오 때 산소에서 일어났던 그 분노가 지금 다시 피어오를 줄이야..

병들어 죽은 사람을 두고 꼭 아내의 잘 못인 양,
시동생과 시댁은 마녀 몰이 하듯 나에게 몰아 부쳤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을 자기 아버지 시신을 묻고 돌아오는...
산소의 흙 자국이 묻은 고무신이 채 씻겨지지 않았던 그 날.
삼촌이란 사람이(시동생) 삼사 해상 공원에 아이들을 승용차에 태우고 나갔다.
얼마 후 딸아이가 신고 갔던 신발은 어디에다 벗어 던지는지
맨 발로 씩씩거리고 분을 참지 못하고 들어오더니.
"작은 엄마요, 이럴 수 가 있어요.
삼촌이 아버지 죽은 조카들에게 위로는 하지 못하더라도
울 엄마를 이렇게 마구잡이로 나쁘게 공격할 수 가 있답니까?
어찌하여 아버지의 죽음이 엄마의 잘 못 이지요?
울 엄마도 아빠 땜에 죽도록 고생하고 희생한 피해자입니다.
그런데, 뭐?
아버지 죽음이 남편 잘 못 거둔 엄마의 잘 못 이라고
자식들에게 엄마하고 혈연의 정을 끊어라고 할 수 있나요?"
그리고 마루바닥을 치면서 엉 엉 소리내어 지 아버지 죽은 한을 내 품었다.
초상을 치룬 바로 그 날이라 그 사람 친구 분들과 시집식구들,
그리고 친정식구들이 가득히 모여서 나의 서러움을 달래고 있는 참이었다.
예고에도 없었던 또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우리 가족에게 다가 오고 있었던 것이다.
시동생이 평상시에 우리 부부에게 정당치 못한 금전 관계로 힘들게 하였는데
거금을 가지고 갈 때는 빌러 간다고 해 놓고
훗날 갚으라고 하면 형제간에 내돈 네돈 찾는다고 언제나 못 마땅하였고.
그 당시에도 빌려 간 상당액수를 갖지 않았기에 좀은 꺼그러운 감정에 있었다.
시동생은 언제나 형들이 자기사업에 한 없이 도와주기를 원했지 않았던가.
당연히 형제이기에 갚지 않아도 된다는 채무관계가 한 두 번이 아니기에..
죽은 형과 잦은 말다툼이 늘 상 있었다.
그러니 별로 달갑지도 않았던 나의 친정 식구들 앞에서
형수가 자기네 호적에 남아 있지 못할 것 같으니
일찌감치 파서 나가라는 트집을 약주 한잔 걸친 김에 토하는 가 본데..
그 날은 그 사람 산에 묻고 온 날이라고 
친정 언니가 삼오 날까지 집안 시끄럽게 해서 안 된다고
아무 말하게 나의 입을 다물게 했다.
억울하다고 울부짖는 자기 동생인 나를 자제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정 식구들이 이런 일도 있느냐고 한 바탕 소동이 났다.

그리고 삼일 후 삼오 날.
시집의 사촌을 포함한 많은 가족들과 친정 피붙이들이 그 사람에게
마지막 인사를 할 겸 그 사람 묻힌 산으로 함께 왔었다.
어쩜 시집식구들은 우리 가족과 마지막 만남이 아닌가 싶은 예감 들었다.
산에서 내려와서 편편한 잔디 위에 자리를 잡았고..
집에서 준비해간 늦은 점심을 친정 올케가 정성껏 차렸는데..
그런데 시댁의 시어머니, 형님, 시동생 손아래 동서 '시'자 달린 모두가
먹히지 않는다고 식사에 손도 되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너무나 불쾌했지만 아무 말하지 않았다.
특히 형님은(그 당시 시숙님은 회사 일 관계로 삼오 때도 산에 오지 못했다)
상 당해서 있는 동안 내내 식사를 집 앞 식당에서 해결한다고 들었다.
그래 암으로 죽은 집구석엔 암이란 병균이 득실거리고 있으니깐...
(나만의 생각이었다)

"형님. 고맙습니다. 수고 많았어 여.
이렇게 우리부부가 묻힐 죽음의 집도 사 주시고....
며칠 후 정신 차려서 아주버니한테 인사도 드리려 큰댁에 곧 들리겠습니다"
"아니, 이제 모던 것이 끝났는데 자네가 우리 집에 올 필요가 있나?
됐네. 오지 말게. 자네 뜻 잘 알고 있으니.."
"예? 형님 뭐라고 했어요? 다시 한 번 말씀해 보이소.
우리 인연 끝났다는 이 말씀입니까?"
그리고 참았던 나의 울분이 미친 사람 발악이 되어
큰 산골짜기 전체를 뒤 흔들어 놓았다.
이제 껏 시집에서 나에 대한 불평의 응어리를 간접적으로 몰아 부쳤던 것을
나 또한 더는 참지 못하고 한이 되어 피눈물로 토하고 말았다.
"형님 뜻 잘 알겠습니다.
암으로 죽은 내 가족과 인연 끊고 싶어서 안달이 난 당신들.
더 이상 연연 안 할겁니다.
내가 모르는 줄 압니까?
잘 사는 큰집에 우리 가족이 빈대 붙을까 봐 엄청 겁났지요.
다 알고 있습니다. 염려 꽉 붙잡아 매어 놓이소.
내 비록 오늘을 살다가 내일 마른 땅에 머리를 박고 죽는 한이 있어도
당신네들 한테 구걸하지 않고 아이들 공부시킬 겁니다"
아마 그 사람 당신 형님에게 유언으로 남긴 아이들 교육 문제로 운운..
심각한 토론이 시댁에서 벌어짐을 뒤늦게 들어서 알았다.
사촌시동생들이 기절한 형수인 나를 허겁지겁 찬물을 퍼부어서 깨웠다.
큰집 형님은 그 자리에서 동서인 나에게 그런 뜻이 아니라면서
건성적인 사과를 하였지만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죽은 그 사람에게 남아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도
앞길이 힘들고 평탄치 못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고 할까...
시댁식구들은 그들대로 산을 내려가고..
우리 가족들과 친정식구들이 함께 산으로 내려왔다.

이제 무엇을 해서 아이들 공부시키고 목구멍 풀칠을 한담!
경제적으로 남편의 오랜 병고 끝은...
수협 어대금 미수금 완불하고 이것 저것 주고받을 것 계산하니
시골집 한 채와 한 5백 만 원 정도의 빚이 훈장처럼 나에게 덩그렇게 남았다.
우리부부가 부모님에게 땡 전 한푼 유산 물러 받지 않았지만
열심히 일했고 아이들 대구에 내보내서 공부시키면서 별 어려움 없이 살았다.
헌데 집안에 우환 3년이면 고래등같은 기와집 지붕이 날아간다고
옛 사람들이 말했듯이 3년 넘게 끌어 온 그 사람 병 수발에
도시의 어지간한 아파트 한채 값이 날아가 버렸다.

나는 아이들을 앉혀 놓고 재산 공개를 했다.
이제는 그 누구도 믿지 마라.
더욱이 큰집이 잘 산다고 가서 손 벌이는 일은 절대 없도록 하거라.
거지가 되어 깡통을 차더라도 큰 집 황금으로 보조 받지는 않는 것이
엄마의 신조이니 너희들도 그렇게 따라 주도록 하거라.
그리고 나 자신과의 그 약속은 지금까지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고 자부 할 수 있다.
큰댁은 큰 건물이 여러 채 있었고..
삼덕동 유흥가에 있는 한옥은 우리아이들 공부하면서
전세로 우리가 얻어 있다가 쫒겨 나올 때 외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