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안도현
연애 시절
그때가 좋았는가
들녘에서도 바닷가에서도 버스 안에서도
이 세상에 오직 두 사람만 있던 시절
사시사철 바라보는 곳마다 진달래 붉게 피고
비가 왔다 하면 억수비
눈이 내렸다 하면 폭설
오도가도 못하고, 가만 있지는 더욱 못하고
길거리에서 찻집에서 자취방에서
쓸쓸하고 높던 연애
그때가 좋았는가
연애 시절아, 너를 부르다가
나는 등짝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 같다
무릇 연애란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기에
문득 문득 사람이 사람을 벗어버리고
아아, 어린 늑대가 되어 마음을 숨기고
여우가 되어 꼬리를 숨기고
바람 부는 곳에서 오랜 동안 흑흑 울고 싶은 것이기에
연애 시절아, 그날은 가도
두 사람은 남아 있다
우리가 서로 주고 싶은 것이 많아서
오늘도 밤하늘에는 별이 뜬다
연애 시절아, 그것 봐라
사랑은 쓰러진 그리움이 아니라
시시각각 다가오는 증기기관차 아니냐
그리하여 우리 살아 있을 동안
삶이란 끝끝내 연애 아니냐
― 안도현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에서
며칠 전 청도 운문사를 다녀왔습니다.
가는 길이 내내 오월이였습니다.
잎이 얼마나 푸르던지 하마터면 눈물이 찔끔 나올뻔했습니다.
맑음이라든가 어두움이라든가... 절망이라든가...슬픔이라던가...
더할 수 없이 지극한 것들을 만날때는 저는 눈물이 차오릅니다.
절 뒤로 흐르는 시냇물을 한참 들여다보았습니다.
오래도록 발 담그고 앉아있고 싶었어요.
숲그늘이 깊어 나 조차 초록잎새가 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한시절을 물위에 띄워보내는 일도 참 하염없이 쓸쓸한입니다.
오랜동안 시집을 펴지 않았습니다.
이제 시집을 열어보아야겠습니다.
어두운 터널을 걸어나온 것 같습니다.
저 꽃진자리좀 보세요.
분홍꽃잎이 고여있는 저 꽃자리.
얼마나 무심했으면...
하릴없이 떨어진 것 처럼...
떨어져 날릴 때의 낙화하던 절실했던 몸짓을 누군가 기억해주려나요.
들여다 보면 한잎 한잎 그렇게 어여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어여쁜 꽃들을 한참 뒤돌아보며 걸어나왔습니다.
여스님들이 공양을 드리다가 딸기밭에 물을 주러 나오십니다.
저는 그 까까머리 비구승을 보다
마냥 서럽기도 하고...어여쁨이 깊어져
어쩔줄을 몰라 숨어서 바라보았어요.
<법고>
저녁 예불 의식 전에 스님이 북을 치십니다.
마치 북과 한 몸이 된 것 같습니다.
경내를 돌아보던 사람들의 발걸음이 모두 멈춥니다.
작은 몸으로 두드리던 그 거대한 울림이 내의식을 깨우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녁밥을 지으러 바닥이 깊은 부엌으로 들어갑니다.
저는 발소리를 숨기며 따라갑니다.
저 아궁이에 불길이 피어오를 때까지 서 있었습니다.
까치발을 들고 담장넘어 스님들이 기거하는 곳을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오랜동안 접어놓았던 시집을 이제 다시 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환한세상과 연애하며 살아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