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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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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세의 비망록


BY 손풍금 2004-12-16

참으로 곤궁했던 시절,
낯선도시에서 처음으로 시작한것은 손가락에 남아있던 반지를 팔아 빵굽는 리어카를 구입하면서 붕어빵 장사를 했다.
아파트 상가 앞에 리어카를 놓고 빵을 구웠다.
채소전을 찾아가느라 상가 지하에 들어서면 부도가 난 마트안에 들어있는 생필품들이 먼지를 뒤짚어 쓰고 앉아있었다.
그곳을 바라보면서 물건을 놓고 속수무책 숨어버린 주인의 심정이 만져지면서 마음이 아릿했다.
 
그해 겨울 상가 마트에 새로운 주인이 나타나면서 마트안에 있던 물건들이 쓰레기봉투에 담겨져 내 리어카옆에 버려졌다.
쓰레기봉지위로 삐죽 올라온것은 충분히 먹을 수있는 라면이 담겨진 봉지, 칼국수가 담겨진 봉지, 팥빙수안의 젤리. 커피, 프림, 초콜렛,포장이 망가져버린 생필품들이 마구잡이로 담겨있었다.
먹을것도 궁핍했고 한푼이 아쉬울때라 그 쓰레기 봉투를 보자 기쁨으로 가슴이 다 설레였다.
먹을 수있는 것을 꺼내려 하는데 마침 동네아줌마들이 모여서서 이야기를 나누다 그 것을 보고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달려와 쓰레기봉투를 쏟아놓고 멀쩡한것들을 버렸다며 추려서 가지고 가기 시작했다.
마음과 손은 먼저 앞서 달려갔지만 남의 동네에 리어카를 세워놓고 장사하는 것도 미안해 그냥 못본척 고개돌리고 말았다.
소문을 듣고 달려온 동네 사람들의 손에 생필품이 담겨졌던 쓰레기 봉투는 수차례 쏟아지며 바닥만 채운채 홀쭉해졌다.
어스름 해질녘 그래도 바닥에 남아있는 국수가 담겨진 봉투를 꺼내고 싶은데 이따금 지나가는 행인들이 혹시 바라볼까 싶어 차마 손을 대지 못하고 말았다. 
아무도 기다리는 이 없는 빈 집으로 들어와 밤이 깊어지는것을 기다리다 빵굽는 리어카가 세워져있는곳으로 향했다.
 
유자처럼 맑고 고운 달빛이 한 겨울 밤 잠든 거리를 비추는데 초저녁부터 조금씩 휘날리던 눈발이 함박눈으로 바뀌어 펑펑쏟아지는데 문구점에 걸린 크리스마스 카드같았고 나는 카드속에 멈추어있는 행인같다는 생각에 이대로 정지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뛰기 시작했다.
리어카옆 어둠속에 서있는 쓰레기 봉투위로 눈이 쌓였다.
눈을 걷어내고 쓰레기 봉투를 여니 국수와 겉포장이 뭉개진 초콜렛이 바닥에 놓여있었다. 그것을 들고 돌아오는데 내 눈물에 닿은 함박눈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어느덧 6년 세월이 흘렀다.
장꾼이 되어 장터로 찾아든지는 4년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내 나이 서른아홉살이였던 모양이다.
장꾼이 되면서 한여름 폭염속에서도 한겨울 한파속,
화장품병에 담겨진 스킨이 대책없는 더위와 추위를 견디어 내지 못하고 툭,툭, 깨어져 나갈때도 나는 장터에 나가 앉아 내 아이들과 하루를 견딜돈을 벌기위해 최선을 다하며 내자리를 지켰다.
한푼벌면 쌀을 사고 나머지는 족쇄처럼 채워진 남겨진 빚을 갚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고속도로 통행료가 없는날도 있었고 기름이 떨어져 가슴조이며 장터로 향하던 날들이 태반이였다.
비가와도 눈이 와도 장터로 나갔다.
이곳이 아이들과 내 목숨 줄이다 싶었다.
내가 앉아있을 곳은 이곳 뿐이다 싶었다.
그렇다고 소리치며 손님을 불러 모으는 재주가 있는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창한 언변으로 상술이 좋은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상냥한 미소로 웃는 얼굴을 하는것도 아니고
그저 꿀먹은 벙어리처럼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물고 먼데만 바라보다 물어보는 말에만 겨우 대답을 하는 내게 찾아온 손님에게 진심으로 감사해 하며 물건을 내놓는 일외에는......
 
해가 바뀌면서 조금씩 매출이 늘기 시작했다.
단골손님이 늘어나면서 손님이 손님을 물고 왔다.
불경기가 제일먼저 찾아오는 서민들이 이용하는 장터에 
매출의 절반이 줄었다고 한숨을 내쉬며 장꾼끼리 이마를 맞대고 두런거리며 체감온도가 느껴질때 내 화장품전 앞에는 손님들이 모여들었다.
어려워진 가정경제에 저가의 화장품 브랜드가 새롭게 광고지를 메우고 뿌려지며 서민들의 관심을 집중시킬때도
단골손님들은 내 화장품전으로 또 다른 손님들을 데리고 왔다.
주위의 장꾼들 시선과 손님들 시선은 한결같이 따뜻해 하루 하루 일하는 기쁨이 견줄수 없이 커갔다.  
매출이 늘어나면서 도매상을 벗어나 공장과 직거래를 하게 되었다.
공장과 직거래를 하니 이윤이 두배가 넘어선다.
내 전을 찾는 손님들에게 좀 더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를 하니 장사가 더 잘되었다.
힘든줄 모르고 하루하루가 보람차다.
대차대조표의 손익분기점이 이제 상승곡선을 타고 있다.
올 한해 아이들이 손내밀때 미안해 하지 않아도 되었다.
고속도로를 지나면서 통행료때문에 불안해 한적도 다시는 없었다.
바위처럼 무겁게 매달려있던 빚이 점점히 줄어들면서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돌아보니 지나온 날들이 아득하다.
 
부도가 나며 고향을 떠나올때 가까운 언니들과 마지막 저녁식사를 했다.
그때의 상황이란 아... 기억하기도 싫다.
너무 아파서...
언니들이 봉투를 내놓으며
'어떻게 되었든 아이들 보고 견디어야지.
산사람은 다 살게 되있어. 그냥 살다보면 세월이 흐르고 아이들은 커갈거야.
설마 굶기야 하겠니, 다 살수 있을거야.' 했다.
그때의 상황이란 굳이 한순간 아무것도 남은게 없는 가난때문에 그처럼 고통스럽고 무서웠던 것은 아니였다.
술만 먹으면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의 그 이전 세월에 대한 좌절과 분노와 체념이 현재와 맞물리며 끝내 나아지지않고 해결되지않는 이 모든것,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그 상황을 두고
'어쩌겠니, 방법이 없으니, 그냥 살다 보면 세월이 흐르고 그러다보면 좀 나아지지않을까.네 업보려니, 하고 위로하면 살아야지.' 하며 말끝을 흐리며 끝내 내게 눈꼽만치의 희망을 두지 않던 언니들을 보고 나는
 
'혹시 들어보셨어요. 막판 뒤집기라고... 누가 알아요. 이 시련이 기회가 될지'. 할때 모두 실소하다 푸하하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막판뒤집기? '
'그래요. 막판 뒤집기'
나는 내 유머가 이때만큼 마음에 들은적이 또 있을까 싶다.
'그래 좋다. 막판 뒤집기.'
 
어제 남은 달력 한장을 무심하게 바라보다 내가 지금 몇살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몇살인지가 도저히 생각이 안 나는거다.
잠자고 있는 딸아이을 깨워서 '엄마, 지금 몇살이지? 하는데
'엄마, 바보여? 마흔네살 이잖아'한다.
바보건 뭐건 간에 나는 분명 마흔두살인것 같은데. 왜 마흔 네살이라고 하는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이번엔 아들녀석을 깨웠다.
'엄마 몇살이였지?'
잠자다가 '마흔 세살, 아니, 참 마흔네살요.'.
엄마 마흔두살아니니? 하는데 잠이 깊이 들은 녀석은 대답도 없이 이내 고른숨을 내쉰다.
내가 왜 마흔 네살이 되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되어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지금 몇살이지?'
 
'마흔네살. 내가 못산다.'
 
'나도 못살것다.'
언제 내가 마흔 네살이 되었지?
내 세월은 마흔두살에 외로운남편과 헤어져 거기서 정지되어버렸다.
 
넘어져도 흙털시간도 상처를 치료할 시간도없이  정신없이 살았다.
이제는 천천히 걸어가면서 길가에 피어있는 꽃도 바라보고
바다에 가서 배를 타고 노을을 바라보고
비가 오면 잔에 포도주를 채우며 휴식을 취할 것이며
눈이오면
눈.이.오.면. 그날 밤 쓰레기봉투안의 남겨진 국수에 대해 감사할테다.
그리고 이제는 하늘도 올려다 보고 하.하. 웃으며 걸어다닐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