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방송이 있는날이였다.
"좀 서두르실래요? 기차타려면 일찍 나가야 하거든요."
내생활을 담아내느라 지난 몇날 함께지내던 다큐멘터리 방송 PD는
"고속버스터미널은 이 근처잖아요."했다.
"이때 아니면 기차탈 시간은 없거든요."하는 내말에
잠이 덜깬 PD는 카메라를 메고 피곤한눈을 부빈다.
"왜 가까운 버스터미널을 두고 먼길로 가세요?"
"제가 좋아하는 기차를 타기위해서요.
늘 마음속에 두고있던 여유로움에 대한 그리움을 신실하게 채우기위해
움직이는거예요.
그러면 하는일 조차 신이나거든요.
장터에 앉아있으면서 휴일을 찾아내 기차를 타고 떠나는일은
내겐 아주 허영스런일이거나 현실을 접어둔 꿈같은 일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일을 보기위해 서울을 가면서 기차를 타고 가면
제가 하고 싶었던 기차여행을 하게 되는거잖아요.
그러면서 나를 돌아보면 대단히 낭만적이고 내자신을 사랑하는 멋을 아는 여자인듯 심한착각에 흔들리기도 하지만.
그 착각이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삶의 에너지를 충전하는지 모르실거예요."
긴말을 꿈꾸듯 하며 만족한 웃음을 지었을때
나이많은 처녀 PD는
"알것 같아요, 그 호사스러운일에 대해서.."했다.
영등포역에 내리면 똑같은 지하철을 타면서도 벌써 수개월째 갈때마다
몇호선인가를 기억하지 못해 몇번씩 갈아타는것을 반복하면서도
나는 그 도시에 대해 당당해 보이려 애쓰지만
마음속으로는 얼마나 허둥대는지 지하철 한쪽켠에 주저앉아 이곳이 도대체 어디지? 하며 울고 싶은심정임에도 나는 서두르지 않고 또박또박 걸으려 애쓴다.
내가 초대받은 서울이다. 가다 보면 어딘가 나오겠지..
함께 걷던 PD가 "늘 이렇게 헤메세요?"한다.
"네..좀 헤메죠.."
혼자 키득키득 웃는다.
"왜 웃으세요?"
"선생님 생활이 신기해서요"
"뭐가요?"
"..글쎄 뭐랄까요. 전혀 여유를 찾을수없는 절박한 상황인데
여유를 즐기는 모습이라니..
그리고 더듬더듬 그자리를 찾아다니면서도 흐트러지지않는 그 모습이..
이해가 되다가도 이해가 되지 않는 그러면서도 마음이 가라앉는 그런거있지요"
"..........나 불쌍해 보여요?"
"아니요. ...아주 용감해요"
"그럼 됐어요. 불쌍해보이는건 정말 싫거든요, 생각해보세요.
어머니가 불쌍해보이면 어떻게 되겠어요, 안그래요?"
함께 지내는 몇주간동안 말라깽이 처녀PD는 머리를 수차례 흔들면서
"오, 주여!"를 외쳤고 나는 그 외침에 "도와주소서!"를 외치다 결국 둘이 마주보며 숨을 쉬지못할정도로 웃어대다 결국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누군가 내 생활을 낱낱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그 날들이 카메라에 담기어 무심히 손님처럼 떠나 버렸고
또다른 오늘
라디오 방송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길 대전역을 지나 영동역에서 내렸다.
영국사를 향한 산길을 올랐다.
숲이 무성한 오솔길이 나오고 생생한 나뭇잎이 푸른기운으로 감싸 안는다.
대부분의 시골길이 그렇듯 오솔길이 갈라지면서 발목을 적시는 혹은 무릎까지 채이는 바닥이 다 들여다 보이는 맑은물이 흐르는 시냇가가 보였다.
더듬거리며 내려갔지만 긴장되지않았고 어느구석에 주저 앉아 울고 싶은 마음도
전혀 생기지 않았다.
시냇물옆 잡풀더미가 경계를 만들어버린 물이 고여있는 웅덩이,
소금쟁이가 물위를 걷는다.
마치 오래전에 마음을 담아 덮어둔 일기장의 글자가 모두 일어나
움직이며 돌아다니는것처럼,
얇고 가느다란 선하나로 생명을 만들어 겅중겅중 물위를 뛰어다니는 소금쟁이가 활자처럼 느껴졌다.
내 이야기를 끌고 다니는 짓궂은 심술쟁이처럼..
풀섶에 있는 작은돌 하나를 주어 바람 한점 없어 흔들림없는
고요한 너무도 고요한 물웅덩이를 향해 던졌다.
다리를 꺾으며 겅중거리던 소금쟁이가 물속으로 빠져 버렸다.
...........
..............................
어서 빨리 가을이 와서 물웅덩이가 낙엽으로 가득채워졌음 하는 생각을 급하게 했다.
덮여져야할 비밀일기가 열려져 물이 되었다.
나는 물위를 걷는 소금쟁이를 잡으러 다니기위해 남은날들에 대해
호사스런 여행을 할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