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정치와 죽음의 관계를 밝힌 정신의학자의 충격적 보고서가 책제목 밑에 씌여진 부제이다. 정치와는 아무런 관심도 없던 내가 이런 제목에 끌린 건 코로나19때문인 것 같다.
국가 위기의 순간에 정부의 대처가 매우 중요하므로, 뉴스에서는 정부를 향해 많은 정보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 전에도 이러했지만, 코로나 19시기에는 나와 이웃의 안전과 직결되어 있으니 관심을 가지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다.
글로벌시대이니 외국의 상황이나 다른 국가의 대처도 귀기울여 듣게 되고.
이렇게 저렇게 떠들어대는 뉴스에서 나오는 많은 언론들의 소리에 매우 혼란스럽고 어디까지 믿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난감하기만 하다.
결국은 '이 정보의 바다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의식있게 생각하고 실천하며 사는 것 그리고, 우리의 행복을 위해 바른 정치인을 뽑는 것으로 까지 생각이 확장되었다.
그러던 차에 이 책을 추천받으니 확 끌릴 수밖에.
이 책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수 십 년간 폭력 문제에 대하여 연구해 온 정신의학자가 어느 날 통계를 분석하다 기묘한 수수께끼에 부딪혔다. 그가 분석한 자료는 1900년부터 2007년까지 미국의 자살률과 살인률에 통계였다. 한 세기동안 일관되게 자살률과 살인률이 동시에 높이 솟구쳤다가 동시에 급격하게 떨어지는 것. 슬프거나 '미쳐서' 자살하는 사람과 범죄적 동기로 남을 해치는 살인자가 어째서 동시에 확 늘었다가 확 줄어드는지는 걸까?에 의문을 가지고 몇 년동안 끙끙 앓기만 하다가 어느 날, 그는 자살률과 살인률의 변화 주기가 대통령 권력 교체와 맞아떨어지는 것을 알아냈다. 보수정당, 즉 공화당 출신이 대통령이 될 때마다 온 나라가 자살과 살인이라는 치명적 전염병으로 고통 받는다는 것이다. 현재 미국 인구로 계산하면, 민주당 대통령이 집권할 때보다 공화당 대통령이 집권할 때 자살자와 타살자가 11만 4,600명이 더 많았다고 이책에서는 보고하고 있다. 이 두 정당의 정치정책이 이런 결과를 초래하는데, 그 뿌리에는 수치심과 죄의식이라는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가치 체계의 감정이 있다. 이것을 정치용어로 하면 '우파'와 '좌파'이념이 된다. 도덕적 분쟁을, 즉 정치적 분쟁을 이해하려면 도덕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둘이 있고 정치도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둘이 있음을 꼭 알아야 한다. 도덕은 마치 단 하나의 도덕 체계만이 있을 뿐이고 사람은 그것을 지켜야지 안 그러면 비도덕적인 것처럼 몰아가지만 사실은 도덕담론과 정치 담론이 처음 생겨날 무렵무터 도덕철학자들은 두 가지 상반된 도덕이 있음을 알았다. 이러한 전제가 있어야 우리는 옳고 그른 문제에서 벗어나 관점의 차이로 이해하면서 조금은 편안하게 이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수치심의 윤리는 수치와 굴욕이, 다시 말해서 불명예와 치욕이 가장 큰 악덕이고 수치의 반대, 곧 자부심과 명예(존경)가 가장 큰 미덕으로 통하는 도덕체계다. 죄의식의 윤리는 죄가 가장 큰 악덕이고 죄의 반대, 곧 순결이 가장 큰 미덕으로 통하는 도덕체계다. 두 가치 체계는 상극이다. 죄의식의 윤리에서는 죽음에 이르는 일곱가지 죄악 중 가장 몹쓸 죄악이 바로 수치심의 윤리에서는 가장 큰 미덕을 통하는 자부심(교만)이다. 따라서 죄의식의 윤리는 아무도 남들에게 우월감을 못 느끼도록(그래서 아무도 열등한 존재로 여겨지는 데서 오는 수치와 굴욕을 맛보지 않도록)평등주의를 옹호하고, 반면 수치심의 윤리는 우월한 사람이 있으며 그런 사람은 자부심과 명예(존경받음)을 만끽하고 열등한 사람은 열등감과 수치심을 느끼는 위계화된 사회체계를 미화한다. 그래서 이런 정치 정책의 차이로 권위주의 보수 정당이 추구하는 사회, 경제 정책은 불평등을 증가시키고 사람들을 강력한 수치심과 모욕감에 노출시킨다. 보수 정당은 사회의 위계질서를 중시하며 타인을 무시하고 경멸하도록 부추기도 불평등을 자연의 법칙으로 찬미한다. 이런 정당이 집권할 때 사회에는 수치심, 모욕감, 분노가 팽배하고 자살과 타살이라는 극단적 폭력이 발생할 확률을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이러한 정당에 자꾸만 표를 던지는가? 이 통계의 정확성은 얼마나 되는가? 자살률과 살인률이 왜 정치에 중요한가? 등 질문에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대답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명쾌하게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왜 우리가 이렇게 양 갈래로 나누어져 싸우고 있는지는 알게 되었다. 크게 보면 어쨓든 정치는 사람들 하나하나가 죽고싶은 세상이 아니라 살만한 세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런 살만한 세상이 되어가기 위해 우리는 나누어서 싸워는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각자의 이념을 뛰어넘어 그 너머에 있는 무엇을 바라봐야 할 것이다. 나누어서 싸우는 데 집중시키는 것이 어쩌면 우리의 눈과 귀를 다 막고자 하는 누군가의 술책일 수도. 이 책은 정치가들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던 통계를 통해 자살률과 살인률을 부추기는 것은 수치심의 정치 가치체계를 가지고 정책을 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요즈음 내가 생각하는 것도 경제적으로 잘 살게 되면 우리는 행복해 지는가?라는 질문이다. 과학이 발달하고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는데 왜 우리는 더 불행해지는가를 알게 되었고, 모두가 평등하게 잘살게 된다는 것이 꼭 경제적으로 가난해 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이제 우리는 어떤 것에도 놀아나지말고 조금은 더 깊은 시각을 가지고 정치적 담론을 주체적으로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사람들 하나하나가 다 행복해 질 수 있는 정치적 담론을 가진 정치인에게 투표해야 하리라. 이제는 부의 양보다는 느리더라도 꼼꼼히 부의 질을 따져봐야 할 것이다.
자살률과 살인률을 현저히 낮추었던 진보당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말로 글을 맺고자 한다. '진보의 성패는 많이 가진 사람의 풍요에 우리가 더 얹어주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너무 적게 가진 사람에게 우리가 충분히 베풀어주는가의 여부에 달려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