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nter><b><font color=green>[드디어 그를 만나다.]</font></center></b>
카페안 화장실에서 머리를 매만지던 손짓을 멈추고, 거울 속에 비치는 흥분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여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나경은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이 정말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저렇게 설레여 좋아라하는 저 여자...저 여자가 정말 나란 말야?!
시간이 점점 다가올수록 나경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그를 만나 차나 가볍게 한잔하면서 승규와 비교를 하면서 나름대로의 잣대로 실망하게 될 거라는 어줍잖은 생각을 했었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 대하면서 서로에게 실망을 한다면 쉽게 잊혀질 것이라고.....
그러나, 그런 생각은 기혁을 만나기 위한 자기 합리화였고, 자기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기혁을 향한 감정이 그렇게 쉽사리 사그라질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경은 더럭 겁이 났다.
어차피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은 그의 외모나 그를 둘러싸고 있는 외부의 조건이 아니었다.
이런 느낌은 살아 오면서 처음이었어....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이 느낌은 아주 특별해....다른 인종에 비해 흑인이 흑인에게 느끼는 유대관계가 특별나듯이...피붙이가 아니지만, 형제같고...남 같지가 않아...기혁씨에게 그런 내가 이러고 있다는 건..너무 위험해......
이건 배신 행위야. 나한테 지극정성이고, 한 마음인 승규씨에 대한 배신이며, 엄마를 배신하는 행위야..그래. 잇쯤에서 끝내는 거야. 한낱 스치고 지나가버릴 바람에 내 인생을 망가뜨릴 순 없어....
나경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둘러 카페 정문을 나서던 나경은 때마침 안으로 들어서는 남자와 정면으로 부딪히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김 나경?"
모니터 화면으로 느낌이 전해지고, 사랑하게 되고, 목소리로 더욱 하나된 느낌을 주게 했던 그녀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짜집기하던 기혁은 죄송하다는 한마디에 처음 보는 나경을 알아본 것이다.
채팅과 목소리로만 그를 만나지 두 달만에 두 사람이 서로의 실체를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기혁씨........"
자신의 이름을 소리내어 말하는 나경의 음색에 절망이 깔려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늦었나?"
"아니..그런 게 아니구....."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로군...사랑이란 정답이 없어. 그냥 사랑일 뿐...더구나, 우린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여진 사람들이야...그냥 사랑한다는 거 하나만으로 만족하면 안되나?"
넥타이를 매지않은 블랙 터틀넥에 걸친 쟈켓의 심플한 차림을 한 남자가....장 기혁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한걸음 한걸음 다가서고 있었다.
"지금 당신 앞에 선 나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라면 지나친 욕심인가?"
"모르겠어요...모르겠어요."
모니터 화면도 아니고, 전화도 아닌 장 기혁이라는 실체를 만나고 있는 그 순간은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백치가 되고 싶었다.
"바다가 보고 싶다고 했었지?"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어가는 기혁을 쳐다보았다.
신기해 할 것도 없었지만, 처음 만나는 두사람에겐 친밀감이 흘렀고, 기혁은 계속해서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있는 나경을 쳐다보았다.
지척에 바다를 두고서도 길눈이 어두워 혼자서는 제대로 바다의 모래사장도 밟아보지 못했다는 그녀를 위해서 기혁은 부산에 있는 바다란 바다는 모조리 보여주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광안리를 거쳐 해운대로, 해운대에서 송정에 다다랐다.
송정에 남다른 추억이 있다던 기혁은 송정에 다다르자 지나간 추억을 떠올리기라도 한 듯이 표정이 야릇해졌다.
기혁에게 사랑의 끝과 시작이 비롯된 송정은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인영과의 결별이후..가족들에게도 소식을 전하지 않고, 은둔한 채로 민박집에 꼭꼭 숨어있던 그가 나경을 알게 된 곳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하루 세끼를 라면으로 떼우면서 바깥 출입이라곤 하지 않던 그가 인터넷 상으로 올려진 나경의 소설을 보았고, 추억을 되새겨주는 그녀의 글에 자신도 모르게 메일을 보내었었다.
그녀가 메일로 감상평을 듣기로는 처음이라고 했듯이, 그 자신도 감상평을 메일로 보내기는 처음이었다.
"라이브 카페 가봤어?"
"아뇨..."
"취향에 맞을 지 모르겠는데...지금 이 시간때면 이 장희가 와 있을 거야."
가수를 직접 본 적이 없으니, 가수의 노래를 라이브로 들어본 적이 있을리 없는 나경으로서는 약간 흥분한 듯이 손뼉을 쳤다.
가수의 무대가 따로이 마련되어 있는 것 말고는 일반 카페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실내에 들어선 나경은 창 밖으로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앉았다.
"일루 와서 앉아."
"왜요? 거기가 더 잘 보여요?"
자리에 앉으려는 그녀옆으로 다가선 기혁은 위치를 바꾸어 앉자고 말했다.
"왜 그랬어요?"
"뭘?"
"왜 바꿔 앉자고 했냐구요? 이 자리나 그 자리나...가수는 잘 보이는데..."
"여기 앚으면 뒤쪽에 앉은 남자를 정면으로 보게 돼."
"아..."
별 거 아니라는 투로 그는 말하고 있었지만, 나경으로서는 지금껏 받아보지 못했던 놀라운 배려에 그저 짧게 아..라고 짧게 말했다.
그의 작지만, 세심하고 특별한 배려는 어느새 그녀의 가슴 안으로 스며들어 그녀의 모든 감각은 오로지 ''장 기혁'' 이라는 남자에게 쏠리고 있었다.
"주문해."
"음...난 아이리쉬로 할래요."
"같은 걸로 주세요."
커피잔 주위를 굵은 설탕이 묻혀져 있는 아이리쉬 커피를 앞에 두고 마냥 행복해 하는 나경을 마주 앉은 기혁은 괜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착잡해졌다.
김 나경이라는 여자...지금 내가 마주 하고 있는 이 여자....
좋은 감정을 가슴에 품고, 그녀를 만난다는 것만으로 들뜨긴 했지만, 이렇게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다니...
길가는 사람을 한눈에 사로잡는 미인상도 아니었고, 입맛 다시게 본능을 자극하는 육체적인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닌 여자였다.
특별한 매력으로 그 자신을 유혹해 왔던 그의 지난 여자들과 조금도 견주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것은 불안한 징조였다.
엥?!
계피가루가 첨가된 아이리쉬 커피를 한 모금 물던 기혁은 마주앉은 여자의 눈가에서 뚝하고 떨어지는 눈물방울에 대꾸할 다음 말을 잊어버렸다.
뻑하면 저 혼자 흥분해 목청을 돋구며, 코멩멩이 소리를 내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잘 운다는 것을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면전에 대고 보게 될 줄이야.
기혁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주는 것으로 울지 말라는 말을 대신했다.
"잠깐...화장 좀 고치고 올게요."
잰걸음으로 화장실에 들어선 나경은 제대로 된 감정제어를 하지 못하고, 울어버린 자신을 향해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를 슬프게 한 것은 그의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이 아니였다.
그의 지난 사랑이 그러했듯이 자신 또한 슬픈 기억으로, 추억으로 남겨질 것이라는 생각이 그녀를 슬프게 했던 것이다.
너무나 쉽게 무너져버린 스스로에게 화가 치밀었다.
나경은 다분히 신경질적으로 파우더를 묻힌 솜으로 두어번 얼굴을 두드리고, 커피잔으로 인해 삐친 립스틱을 손가락 끝으로 수정했다.
다시 앞으로 되돌아 온 여자의 표정은 복잡다양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어낼 수가 없었다.
반쯤 남은 커피를 마시고 뭔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그녀앞으로 기혁은 반쯤 마시다 만 커피를 내밀었다.
"마셔. 한 잔 더 시켜줄게...같은 걸로 마실래?"
같은 아이리쉬 커피를 두잔 반이나 마셔대는 그녀...입술 끝자락에 묻어난 계피가루를 혀끝으로 핥는 그녀...
그런 그녀를 가슴에 담아 두어야 하는 현실...
아무리 해도 자신의 힘으로는 뒤바꿀 수 없는 현실이 한마디로 정말 좆같았다!
지랄같은 기분과는 상관없이 출출해지는 기운이 느껴졌다.
"장어 좋아해?"
"네..."
"장어 먹으러 가자."
따르릉, 따르릉...
가방속에서 울리는 노래소리에 난색을 드러내는 여자의 얼굴에서 기혁은 또 한 번 지랄같은 현실을 맞닿았다.
"전화 온 거잖아....받아."
"..."
미리 핸드폰의 전원을 내려두지 않은 것을 후회하면서 나경은 아프게 입술을 깨물었다.
나경은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충격으로 그만 핸드폰의 울림소리가 멎어지기를 기다렸다.
그가 자신의 입장을 다 안다고 해도...그를 앞에 두고, 말끝을 얼버무려가면서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연신 울어대던 핸드폰이 잠시 멈춤상태로 들어가자, 기혁은 근육에 어거지 미소를 덧붙이고 있는 그녀에게 일부러 목소리를 한 톤 높여 말했다.
"죽성 알아?"
"아뇨...어딘데요?"
"맘에 들거야, 거기도 바다거든."
나경은 잠시 멈춤상태인 핸드폰을 완전히 죽여놓았다.
전화를 한 사람은 승규일 것이다.
누구나 가끔은 이렇게 미쳐버리는 순간이 있을거야..
그렇게 자기변명을 늘어 놓으면서 속으로 이미 승규의 반격에 맞대응할 핑계거리를 짜내고 있었다.
나경은 이미 예정된 이별을 담은 기혁과의 짧은 사랑을 위해서 메스꺼울 정도로 이기적인 발상을 자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해가 져 차 창밖으로는 어둠이 깔려 있었고, 죽성이라는 작은 섬 바다를 가는 길 또한 반비포장 도로도 어두웠다.
가끔씩 드러나는 비포장도로를 달릴 때마다 차는 덜컹거렸고, 차의 움직임에 따라 나경의 심장도 뛰고 있었다.
비릿한 바다내음이 코끝을 자극하는 죽성에 다다랐고, 나경을 그를 따라 차에서 내렸다.
"아우!"
"왜 그래?"
"돌부리에...걸렸어요."
"잡아."
그가 손을 내밀었다.
선뜻 손을 잡지 못하는 그녀에게 말했다.
"야박하게 굴지마..손만 잡는 거야."
"고마워요..."
그의 손은 그냥 단순히 사람의 손이 아니었다.
나경은 그의 손을 잡는 순간, 불에 데는 것 같은 뜨거움을 감지했다.
노천 천막안에서 숯불에 구워지는 장어의 맛은 최고였지만, 나경은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익!"
불에 닿은 장어 꼬리부분이 그녀 앞으로 점프하듯이 꿈틀거리는 것에 놀란 나경의 얇은 비명소리에 기혁은 얼른 꼬리부분을 재떨이에 버렸다.
쉽사리 흥분하고, 잘 울고, 그리고 놀라기까지 잘하는 ...은근히 다혈질적인 나경을 쳐다보는 기혁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기분좋게, 그리고 알딸딸하게 보기 좋을 만큼 취한 나경은 얼굴을 들어 낯선 사람처럼 쳐다보듯이 기혁을 쳐다보았다.
그의 외모가 어떻든 상관없다는 처음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마 그가 절름발이었다고 해도 그를 사랑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경은 유심히 그를 쳐다보았다.
어차피 추억속으로 남겨질 사람이지만...지금의 이 혼란스러움으로 순간 순간 제정신에서 탈퇴하게 만들어버린 유일무일한 남자를 가슴 속에 담아두고 싶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기혁은 나경의 가슴에 담아졌고, 채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