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 얼굴에 꽃이 폈네요
갑자기 막내아들 내외가 온단다. 왜냐고 물으니,
“왜요? 그냥 가면 안 돼요?”한다. 무슨 말씀을. 오면 좋고 보면 반가운 게 자식이 아닌가. 바빠서 엄마가 퇴원을 하셔도 와보지 못해서, 송구했다는 말도 얹어 보낸다. 냉동실에 얼어 있던 갈비를 녹이고, 묵은 김치를 물에 대충 빨아서 담근다. 갈비찜을 좋아하고 깡통참치에 지지는 묵은지를 좋아하는 녀석이니까. 때를 맞춘 듯 삶은 시래기도 있다. 아, 막내딸이 공수 해 놓은 포장육개장도 서너 봉지 있다. 이만하면 저녁상은 훌륭하겠는 걸. 맞벌이를 하는 아이들이라 아마도 집밥이 그리울 터. 내가 그 맘을 알지. 그래서 특별히 시래기를 챙기는 것이다.
핏물을 뺀 갈비가 우루루 한김 익으며 구수한 맛을 풍기자, 갈비찜을 좋아하는 막내딸 내외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갈비가 넉넉하니 먹이기도 하고, 간만에 서로 얼굴도 보라고 불러야겠다.
“저녁 먹으러 올 테야?” 문자를 보내니 곧장 답이 온다.
“우리 짐 밖인데요. 몇 시까지 가면 돼요?”
“글쎄다. 7시쯤?” 이래서 막내딸 네도 합세를 하게 되겠다. 이렇게 되면 아래층의 식구도 전화를 해 봐야 하겠지. 혹시 다른 약속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예. 우리 지금 스케이트 타고 집에 들어가고 있는 중이예요. 집에 도착하면 곧 올라갈게요.” 아들의 답이다.
핸드폰이 운다. 막내딸이다. 모두 모이게 됐다는 소리에,
“우리 코스트코(costco)에 와 있어요. 필요한 거 없으세요?” 한다. 돈을 쓰고 싶은가 싶어서,
“없어. 다 있다.”하고 얼른 끊는다. 금방 벨이 또 울린다.
“왜 엄마 말만 하시고 그냥 끊으셔요. 회 한 접시 떠 갈께요.” 그것 참 좋은 생각이다 싶어서,
“좋~지.”한다. 오늘 저녁엔 근사한 상차림이 되겠는 걸?!
이렇게 해서 계획에도 없었던 저녁 모임을 갖게 되겠으니 그 아니 좋은가.
그런데 딸을 부르고 보니 돌아가신 시어머님 생각이 난다. 다섯 따님을 두신 시어머님은,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시누이들을 알뜰히도 부르셨다. 하나라도 빠지면 큰일이 나는 듯 챙기셨다. 나는 그게 너무나 싫었다. 다섯 시누이들은 하나같이 맏며느리 자리로 출가를 했다. 시댁에서는 일꾼처럼 살고 있다는 핑계로, 시어머님은 친정에 온 따님들에게 끔찍이도 몸을 사리게 했다. 그러니까 친정에 오면 아주 큰손님 노릇을 하는 게지. 그러니 올케인 나로서는 밥식구가 늘어나는 게 싫을 수밖에. 내색은 하지 못하고 반가운 척 웃어주지만, 내 속 마음으로는 시어머님이 적지 않게 야속했었다.
그런데 지금 나도 막내아들 내외가 온다는데 막내딸 내외를 부르지 않았는가. 이런! 이런! 나라고 그 야속했던 시어머님보다 나은 게 뭐람. 갑자기 내 며느님 얼굴이 어른거린다.
‘어쩐다?’ 어째야지?’
‘아항. 그래. 며느님들 오기 전에 내가 준비를 완벽하게 다 해 놔야지.’
“여보. 2층에서 교자상 좀 내립시다.”이럴 땐 영감도 신이 나는가 보다. 내 말을 잘 들어준다.
내려진 두 개의 교자상에 수저부터 얹는다. 김치도 두 보시기. 나물들도 모두 두 접시씩, 김도 갈라서 담아놓고 그리고 또…. 따뜻해야 할 음식만 제하고는 완벽하게 세팅을 끝낸다.
약속시간이 다가오자, 밥을 안치고 갈비찜을 익히고, 묵은지볶음도 불에 올려놓고,육개장을 데우고 휴~. 내 집에 꼭 두 번 다녀가신 친정어머니가 오셨을 때에도, 나는 이리 부산하지 않았다. 시부모님이 오셨을 때라고 다르지 않았다. 워낙 바쁘게 살았고, 그때는 일하는 아줌마가 있었으니, 장만 봐다 들여 밀면 그만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참 못된 딸이었고 많이 부족한 며늘년이었구먼. 그러게 두 댁 부모님이. ‘한 번만 다시 모실 기회를 주시어 내 못다 한 한을 풀어주셨으면.’하고, 되지도 않을 망상에 사로잡히곤 한다. 잠깐의 꿈인 듯 시댁의 정지 문에 들어서는데, 대문 벨이 요란스럽게 운다. 깜짝 놀라 하마터면 상 위로 주저앉을 뻔했구먼.
큰 며느님이 들어선다. 손에는 이미 앞치마가 들려있다. 당연하다는 듯 주방으로 직행한다.
“앞치마는 왜 입어. 내가 다 해놨어.” 며느님이 입을 열기 전에 나는 손사래를 친다.
“아유. 어머니. 이러시면 제가 더 기분이 안 좋아요. 좀 진즉에 말씀하셔야지요.”
“???”기분이 좋지 않을 것까지야. 좋다는 소리인지 심통인지 가늠이 되지를 않는다.
“너 일 안 시키려고 그러셨나 본데. 다음엔 좀 일찍 알려주세요.”큰아들의 교통정리용 멘트다.
안방에 차려진 상을 넘겨보고는, 아들도 며느님도 썩 기분이 상한 거 같지는 않다. 암. 그래야지.
막내아들내외도 내가 좋아하는 홍시를 한 상자 들고 들어오고, 막내딸내외도 회 접시를 든 사위를 앞세우고 들어선다. 왁자지껄 인사를 주고받고는, 회를 기다리느라고 배가 많이 고팠다고 넉살을 떨며 자리를 잡아 앉는다.
“어머니. 밥 풀까요?”역시 큰 며느님이다. 작은 며느님도 쫄랑쫄랑 주방으로 향하는 걸보니, 시집은 시집이구먼. 없는 반찬도 두 그릇씩 나누어 얹고 갈비찜과 회를 메인으로 하니 밥상이 제법 걸다. 배가 고프기는 몹시 고팠나 보다. 역시 막내딸아이는 갈비찜이 맛이 있다며, 갈비찜을 하다가 실패를 한 이야기를 해서 한바탕 웃어본다. 회는 남정네들에게 인기가 좋다.
“어머니. 저희들 이 시래기나물 좀 싸주세요.”큰 며느님이 내 귓전에 대고 속삭인다.
“에구. 다가 이건데. 내일 사다가 해다 주마.”
며느님과 내 밀담을 들은 딸아이가 말한다.
“아 잘됐어요. 인터넷에 시래기를 주문을 했더니 어찌나 많이 왔는지. 어떻게 해먹는지도 모르겠고. 엄마한테 다 갖다 드릴 테니 볶아서 저도 좀 주시고, 집집이 나눠주세요. 호호호.” 며느님들이 모두 환영의 박수를 친다. 허허, 큰일을 떠맡았구먼. 막내딸아이가 다시 입을 연다.
“아, 그리고 이렇게 다 모이게 되면, 엄마는 밥이랑 국만 준비하세요. 그리고 우리가 한두 가지씩 들고 오는 거 어때요? 엄마가 혼자서 이렇게 준비하시려면 너무 번거러우셔요.”
“다들 바쁘고 집밥이 그리운 사람들인데. 나, 아직은 괜찮아.”하고 나는 손사래를 친다.
“엄마. 걱정을 마세요. 우리가 음식을 만들어 오겠어요? 사들고 오지요. 그렇잖아요? 호호호.” 딸은 제 올케들을 둘러보고는, 만장일치로 가결이 되었다고 숟가락으로 탕탕탕 상을 때린다.
어느 결에 술을 준비했을꼬. 허긴. 이럴 땐 술 한 잔이 없으면 재미가 없긴 하지. 이제 누구랄 것도 없이 사십 줄의 남정네들이니 주량도 만만치 않기는 하겠지. 영감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주고, 두 아들과 사위가 조심스럽게 잔을 들어 원샷. 나는 사실 술자리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술이란 묘한 구석이 있어서, 제 주량에 맞게만 마신다면 참 좋은 음식이 될 수도 있긴 하다. 말수가 적은 우리 집 남정네들도 술이 한 잔씩 들어가면 가슴을 연다. 서로 격의 없이 더 가까워지는 분위기다. 이렇게 듬직한 아들들과 사위 그리고 예쁜 두 며느님과 애교쟁이 딸년들을 불러 모으면, 나는 세상에 부러울 게 없는 부자가 된다. 이제는 나보다 훨씬 키가 자란 손녀딸아이도, 의젓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니 방안이 그득하다. 에구. 일본에 있는 작은아들네 손주녀석도 왔으면 좋았을 것을.
술병이 비워지자 나는 큰아들에게 넌지시 부탁을 한다.
“엄마 자전거패달이 너무 무겁게 돌아간다. 조절하는 다이얼이 고장이 났는지 요지부동이야.”
큰아들이 얼른 일어나 자전거에 올라 앉아서 이리저리 살핀다. 2층에서 여러 가지 공구를 들고 내려와서 손을 본다. 그 사이 사위가 밖에 세워놓은 제 차에서 컴퓨터를 들고 들어온다. 우와. 화면이 커서 웬만한 TV만 하다. 기존의 컴도 작지 않은데 바꿔준단다.
"에구~. 우리 예쁜 사위가 꼴난 장모를 위해서 고맙게도 또 이쁜짖을 하네 후후훗."
베란다에서는 자전거를 손 보고 내 방에서는 컴을 교체하니 ,작은아들은 도우미 노릇을 하느라고 이리로 저리로 몸이 분주하다.
“어떻게 자전거를 다 뜯어 볼 생각을 해.”작은아들이 제 형의 기술을 칭찬하는 소리겠다.
자전거도 컴도 제대로 제 자리를 잡고, 일이 끝나자 큰아들이 말한다.
“어이. 우리 모인 김에 의논 좀 하지. 아버지 생신 말인데.” 다가오는 영감의 생일을 의논할 모양이다. 아직 두 달이나 남았는데 말이지.
“생신이 딱 년 말에 걸렸더라구. 망년회 겸 나가서 먹지.”하는 큰 아들의 말에, 이른 예약이 필요하겠다고 이구동성이다. 사실은 나도 며느님들을 생각해서 그리 하자고 하려던 참이다.
“전에 갔던 <ㅈㅍ정> 괜찮았잖아?”작은아들이 못처럼 입을 뗬지만 내가 참견을 한다.
“아냐. 거기는 너무 비싸. 그냥 집에서 가까운 데로 해라.”내 말에 작은아들이 고집을 부린다.
“엄마. 우리가 알아서 할게요.” 쯔쯔쯔. 기어코 <ㅈㅍ정>으로 의견을 모으는 모양이다.
“언니한테 전화 좀 해봐라. 잘 있나.”
“우리 엄마 누나가 빠져서 섭섭하신가 보다. 전화 좀 해 드려라.”큰 아들의 명령에 딸아이가,
“거긴 지금 오전 10신데 학교에 나가지 않았을까요? 문자로 해 볼게요.”한다. 막내딸아이의 문자에 곧 답이 온다.
“수업 중. 연락할게.”
그랬구나. 분명히 곧 전화가 올게다. 늘 그랬으니까.
내 사주에, 말년에 운수가 대통 한다 했지? 암, 이만하면 운수대통이지. 큰아들이 말한다.
“우리 엄마 얼굴에 꽃이 폈네요.” 그래. 이제부터 엄마 얼굴엔 늘 꽃을 피울 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