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앤
염색을 하기 시작한지 아마 10년은 되었지 싶다. 아니 새치를 감추느라고 염색을 시작했으니 그보다 더 오래 전일 것 같기도 하다. 친정어머니를 닮아서, 다른 이들보다는 좀 늦은 나이에 하얀 머리가 났지 아마.
파마를 할 때마다 나는 작은 고민에 시달린다. 염색을 해? 말아? 아, 그러고 보니 파마를 하냐 마느냐를 두고도 고민을 겸한다. 긴 시간 고민을 하다보니 파마를 할 때쯤이면 언제나 지저분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파마를 하고나서는 깔끔한 모양새에 늘 만족을 하곤 하지.
사실 나는 아주 늦은 나이가 되도록 생머리를 즐겼다. 오십 대 끝 무렵까지는 단말머리를 고수했고, 제법 잘 어울린다는 소릴 듣곤 했었다. 아마 젊어보인다는, 아니 어려보인다는 소릴 듣는 데에도 내 단발머리가 한 몫을 했겠다.
점점 발전을 해서 이젠 염색이 아니라 코팅파마를 한다. 차라리 염색으로 새까맣게 볶아 놓는 것보다 훨씬 자연스럽다. 노란 물감을 가미하면 노르스름한 게 멋스럽고, 보라색을 첨가하면 그런대로 환상적이다. 물론 나만의 만족이겠지만 케케케.
하필 오늘은 보라색이 떨어졌단다. 어쩐다? 아쉬운대로 연한 밤색을 섞으라 했더니 그도 떨어졌단다. 장사를 하지 않을 것이냐고 조아렸더니, 약을 대 주는 이가 다녀간지가 한 달은 되고 전화 연락도 두절이란다. 바빠서 나갈 수는 없고.
무슨 색이 있냐고 물으니 빨강색이 있다 한다. 빨강색이라…. 거 참 묘하겠는 걸. 빨강색이라. 보라색이 아직은 머리에 남았으니 어디 보까시로 해 봐봐? 그냥 까만 머리는 싫은데. 오늘은 꼭 파마를 해야 한다. 한 달을 별러서 어렵게 오지 않았는가 말이지.
그래서 빨간색으로 낙찰을 보는구먼. 걱정스럽긴 하다. 어떨까? 미국 할망구 같이 되지 않겠어? 그래. 미국 할망구 돼 보지, 뭐. 하하하. 파마를 말고 앉았는 동안 걱정이 반이다. 공연히 빨강을 하라 했나? 에~라. 이제 걱정을 해 봤자지.
히히히. 머리에 꽃이 폈다. 요란스럽게도 화려하다. 걱정스럽게 머리를 쓰다듬는 나에게, 마침 파마를 하려고 앉았는 손님들이 말한다.
“아이고 곱다. 나도 10년만 젊었으면 그렇게 해 보고 싶구먼.”
이래서 내 머리는 ‘빨간머리 앤’이 되었다. 뭐, 그런대로 나는 봐 줄만은 한데, 남들에게 보라기에는 좀 민망하다. 그래도 내 기분은 좋다. 사람이 세련되지 못하니 언발란스해 보이기는 하지만 핑계김에 빨강머리도 해 보는 거지.
그런데 영감이 말이 없다.
“그게 뭐야.”라고 타박을 하든지,
“곱다.”하던지. 그럴 리가 없음을 알면서도 무관심한 영감이 차라리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