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 한 구석에 구겨넣은 카드 고지서를 꺼내 뚫어지게 쳐다본다.
도대체 뭘 사느라 긁었길래 카드값이 이렇게 많이 나오는걸까?
문득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을거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지갑을 흔들자 짤랑거리는 동전들의 아우성이 들린다.
딸랑 소주 한 병값이 빼꼼하고 고개를 내민다.
바구니 가득 맥주캔을 담아 온 그녀는 남자친구 품에 안겨
인터넷 쇼핑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입은 분명히 두 개인데 맥주캔은 딸랑 하나다.
남자친구가 한 손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한 손은 맥주캔을 들고
활짝 웃는 표정으로 그녀가 갖고 싶어 하는 건
뭐든지 바구니에 담으라고 한다.
그녀는 신이 나서 폴짝폴짝 뛰며 애교를 부리다가 남자친구의 볼에 입을 맞춘다.
오래 보고 있기에는 너무 역겨운 장면들이 쉴 새 없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편의점에서 이미 유명한 바퀴벌레 한쌍으로 소문이 나 있다고 한다.
나만 모르고 있었다. 다른 테이블에 앉아
컵라면으로 허기를 달래던 사람들은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부러운 눈빛으로 흘끔흘끔 쳐다본다.
냉장고 바로 옆에 앉아 있기에 지나가는 척 하다가
슬쩍 핸드폰을 훔쳐 보다가 깜짤 놀라고 말았다.
여자들이 명품잡지에서 침 흘리며 쳐다보고
사고 싶어하는 비싼 명품들을 아무렇지 않게 바구니에 담고 있었다.
그것도 해외 직구로 백만원도 아닌 천만원 넘는 가방과 옷들을
일시불로 카드결제를 한다.
그렇게 돈이 많은 사람들이 왜 편의점에 앉아서 저 난리를 치는 것일까?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딸랑 소주병 하나를 계산대에 올려놓고 동전들을 내면서 직원에게 물었다.
직원오빠의 한 마디는 정말 충격적이었다.
“ 이 건물주 아들이예요! ”
“ 이 건물에 사무실도 있고 가게들 잘 돌아가는지 매일 돌아보다가 들르는거예요!
저기 앞에 큰 병원도 건물주가 주인이예요!”
조물주 위에 건물주!
그 위대한 건물주가 바로 눈앞에 존재하고 있다.
오피스텔과 상가들까지 합쳐 60층짜리 건물주가
저 바퀴벌레 커플이라니 믿을 수가 없다.
아버지를 잘 둬서 이미 상속까지 마쳤다는 축복받은 왕자님이다.
이 동네에서 제일 크고 고급스러운 편의점도
저 왕자님이 직접 투자하고 운영하는 거라고 직원오빠가 살짝 귀띔해 주었다.
안주도 없이 소주병만 덩그라니 놓여 있는 테이블이 슬퍼 보인다.
카드 고지서에는 그 인간에게 무료봉사한 억울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소주를 병째 한 모금 들이키고 차근차근 들여다 본다.
눈알을 아무리 굴리며 쳐다봐도 그 인간을 위해 쓴 것 말고는 없다.
부글부글
속이 끓어오른다.
핸드폰 카메라를 가까이 대고 카드 고지서를 여러장 찍어 그 인간의 번호를 누른다.
“ 그동안 네가 쓴 카드값이야! 당장 내놔!”
“ 너 때문에 난 신용불량자 돼서 거지될 지경인데 넌 해신이랑 잘 놀고 있냐?
오늘 당장 보내고 카드값 다 갚을때까지 매달 돈 보내!”
눈을 질끈 감고 전송버튼을 누른다.
벌써 소주가 반이나 날아가 버렸다.
지갑 속에는 먼지만 펄럭인다.
찔끔찔끔 목만 축이고 있는 소주가 서럽게 느껴진다.
조건 없이 무조건 사랑했던 시간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들이닥쳐 버린 빈곤 앞에서 비굴한 사랑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돌이켜 보아도 아픔만 존재할 뿐 단 한 순간도 행복했던 시간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저기 건물주 바퀴벌레 한쌍이 진하게 입을 맞춘다.
유리창 밖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 편의 로맨스 영화를 보듯
한참동안 바라봐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한참동안 입을 맞춘다.
바닥에 간신히 몸을 누인 소주 한 방울을 슬픈 눈으로 바라본다.
그 인간은 아직도 답장이 없다.
늘 그랬듯이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다.
문자나 메일을 보내면 한 번도 답장을 보낸적이 없는 인간이다.
왜 답장을 보내지 않았냐고 물어보면 늘 바빠서 못보냈다고 핑계를 댄다.
그렇게 못된 남자가 해신이의 sns 에는 답장을 잘도 보낸다.
대문 사진이 바뀌었다.
지난번 사진보다 더 닭살 돋는 커플사진이 떡 하니 올라와 있다.
커플티에 커플 선글라스까지 걸치고 개폼을 잡고 있다.
누가 봐도 꿀이 뚝뚝 떨어지는 사진이다.
옷 스타일을 보니 딱 해신이 스타일이다.
그 인간이 염색까지 하고 파마까지 한 걸 보면 미친게 틀림없다.
헤어디자이너인 해신이가 그 인간을 마네킹 삼아
헤어스타일을 자주 바꾸며 사진을 올려 놓는다.
그 인간은 뭐가 그렇게도 좋은지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저렇게 웃다가 입이 찢어지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때가 된거라는데
저 인간이 죽기전에 발악을 하는게 아닌가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해신이가 선물해 준 하늘색 티셔츠
“우웩!”
이렇게 답글을 달고 싶었지만 참는다.
해신이가 선물해 준 선글라스
“저팔개니? 너한테 안어울리거든!”
라고 답글을 달고 싶었지만 또 참는다.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실력이 좋은 헤어 디자이너 해신이가 해 준 머리 스타일
‘웃기고 있네! 네가 미쳤구나!’
라고 답글을 달려다가 또 또 참고 만다.
분노를 이기지 못해 소주병을 테이블에 사알짝 내리친다.
힘을 주어 내리쳤다가는 박살이 날것 같아 억지로 손에 힘을 빼야했다.
요즈음 해신이가 피부관리를 배운다고 해서 덕분에 내 피부도 좋아지고 있다.
팩을 붙인 내 얼굴!
허연 가면을 쓴 징그러운 귀신같은 사진 한 장이 올라와 있다.
세수도 제대로 안하던 인간이 팩을 붙이다니 천지가 개벽할 일이다.
그 옆에 해신이도 똑같은 팩을 붙이고 주접을 떨고 있다.
부글부글
속이 끓어 올라 참을 수가 없다.
테이블에 마시다 만 술이라도 없는지 두리번 거리다가
레이다망에 걸린 멀쩡한 맥주캔들이 눈에 띈다.
아까 그 바퀴벌레 한쌍이 남기고 간 흔적이다.
직원오빠는 상냥한 미소를 지우면서 내가 앉은 테이블에 살짝 놓아 주었다.
군침가득 고인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면서도 눈가에 눈물이 흘러 내렸다.
궁색해진 현실이 너무 슬펐다.
그러면서도 어느새 손가락은 맥주캔을 똑 따고 있다.
시원한 물줄기가 타는 목마름을 단숨에 해결해 주는 기분이었다.
서러운 눈물이 맥주캔 위에 뚝뚝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