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쌀포대를 나르느라 희철의 등은 쉴 새가 없었다.
그래도 시멘트 포대를 나르던 시절보다는 행복했다.
트럭 가득 쌓인 쌀포대를 바라볼때마다 배가 부른 것 같았다.
방앗간이 그렇게 잘 될줄은 몰랐다.
희철을 바라보는 상덕의 마음은 편치가 않았다.
물가에 어린 아이를 내놓은 듯 불안했다.
방앗간 가득 쌀포대가 쌓였다.
커다란 대야에 쌀을 가득 담았다.
햅쌀의 윤기가 기름을 칠해놓은듯 윤이 났다.
쌀을 씻는 일도 보통이 아니었다.
희철은 어깨가 뻐근했다.
아직도 씻어야할 쌀이 태산이었다.
깨끗이 씻은 쌀을 채에 받쳐 물기를 뺐다.
기계속에서 곱게 가루로 변하는게 신기하기만 했다.
찜통에 천을 깔고 쌀가루를 촘촘하게 담아 뚜껑을 덮었다.
여러 색깔의 채소들을 깨끗이 씻어 물기를 뻈다.
희서가 좋아하는 파프리카를 곱게 갈았다.
알록달록한 색으로 떡을 만들걸 생각하니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떡이 다 쪄지자 도마에 놓고 찰지게 반죽을 했다.
갈아놓은 파프리카를 넣고 골고루 색이 베이게 잘 섞어 놓았다.
파프리카색이 곱게 든 떡반죽이 예뻐 보였다.
가래떡 기계에 반죽을 넣고 길게 뽑아 물에 담갔다.
마무리된 떡을 바라보며 상덕이 말했다.
"생각보다 잘 만들어졌는데!"
"이걸 얼마 받아야되니?"
떡을 한입 베어 물었다.
달콤한 파프리카향이 베어나와 맛이 있었다.
희철은 다이어리에 열심히 메모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 만들어진 가래떡을 카메라에 담았다.
블로그를 만들어 가게를 선전할 생각이었다.
밤을 새는줄도 모르고 열심히 떡을 연구하고 만들었다.
말로는 서운하게 해도 믿고 맡겨주는 상덕이 고마웠다.
상덕을 위해서라도 꼭 성공하고 싶었다.
예쁘게 만들어져 가지런히 놓인 떡을 바라보며 가슴이 뿌듯했다.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도 전혀 배고픈걸 몰랐다.
시계를 보니 새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떡을 비닐로 잘 싼후 방앗간을 말끔히 청소했다.
기계에 붙은 쌀가루를 떼어내는게 보통일이 아니었다.
설겆이라면 자신있다며 큰소리쳤지만 이마에 구슬땀이 맺혔다.
정리를 끝내고 한숨을 돌리는 사이 창밖엔 햇살 한줄기가 비치고 있었다.
문을 열고 상큼한 새벽공기를 들이마셨다.
싸늘한 가을바람이 코끝을 시리게 했다.
문득 그녀의 목소리가 그리워졌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통화버튼을 눌렀다.
다행히도 그녀는 아직 깨어있는 목소리였다.
“아직 안자고 뭐 해?”
“오빠가 준 기획안으로 메뉴판 만들고 있었어!”
그녀는 피곤한 듯 약간은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아직까지 일한거야?”
그녀는 걱정스러운 듯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희서 먹여 살리려면 열심히 일해야지!”
“오빠가 만든 떡 보여줄까?”
“전화 끊고 영상통화로 다시 걸게!”
“기다려!”
희철은 전화를 끊고 영상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녀가 환한 얼굴로 반갑게 맞아 주었다.
“오늘 연구해서 만든 떡 보여줄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었다.
희철은 파프리카로 만든 예쁜 떡을 그녀에게 빨리 보여주고 싶었다.
핸드폰을 가래떡이 있는 곳으로 가져갔다.
그녀는 너무도 예쁘게 물들여진 가래떡을 바라보며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한참동안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희철은 오랜만에 그녀의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 아픔만 안겨주었던 시간들이 너무도 미안했다.
며칠새 야윈 모습이 가슴속 깊이 상처로 다가왔다.
억지로 아픔을 감추려 애를 쓰는 그녀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오빠가 못나서 미안하다!”
눈가에 이슬이 맺혀 핸드폰 화면위로 흩어져 내렸다.
그녀는 눈물을 바라보며 슬프게 속삭였다.
“울지마!”
“이제 우리에겐 행복한 시간들만 남았잖아!”
그녀는 화면위에 흩어진 눈물을 닦아주며 울먹였다.
“우리가 정말 잘 할 수 있을까?”
“그럼!우린 꼭 해낼 수 있을거야!”
“화이팅!”
희철은 그녀의 응원에 힘이 솟는것 같았다..
밤을 새느라 충혈된 그녀의 눈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지금이라도 눈좀 붙이지 그래?"
"아니!아직 할 일이 많아!"
책상에 가득 쌓인 자료들이 눈에 띄었다.
"인터넷으로 자료 찾는데도 한계가 많아!"
“전문서적을 사서 봐야할것 같아!"
그녀와 전화를 하는사이 벨이 울렸다.
상덕이었다.
"뭐 해?"
화가 많이 난 목소리였다.
"오늘 새벽시장 가는것 잊었어?"
"정신 어디다 두고 사는거야?"
"집으로 오라고 했잖아!"
희철은 상덕의 집으로 달려갔다.
차가운 새벽공기가 목줄기를 아프게 타고 스쳐갔다.
희서와 전화하는 사이 깜빡한 사실을 원망했다.
이른 시간인데도 새벽시장으로 가는 길은 만원이었다.
상덕은 답답한 마음에 담배 한개비를 입에 물었다.
"내가 담배 끊으려고 해도 너때문에 다시 피운다!"
"미안해!"
"정신 바짝 차리고 준비해도 망할판인데 사랑놀음이냐?"
"연애만 하는것도 아니고 같이 사는거잖아!"
"애들 소꿉장난으로 이렇게 철딱서니 없게 하면 오래 못간다!"
시장에 도착하는 내내 상덕의 잔소리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희철은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벌써 새벽장사를 준비하려는 차들로 주차장은 북적거렸다.
주차할 곳이 없어 몇바퀴를 돌아야했다.
"철없는 동생덕에 사서 고생이다!"
채소를 가득 싣은 수레들이 위태위태 시장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삶의 터전을 열심히 가꾸어 나가는 모습속에서 사람 사는 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
희철은 나태하게 살았던 자신을 질책하며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제일 먼저 쌀가게에 들렀다.
상덕은 쌀봉지 하나를 뜯어 손바닥에 펼쳐 보았다.
한참을 만져보고는 입안으로 가져갔다.
오랜 경험으로 쌀에는 도가 튼 사람이다.
쌀을 사기전에 항상 쌀을 확인해 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냥 가서 떡을 했다가는 망치기 일쑤였다.
좋은 쌀에서 좋은 떡이 나온다는 신념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상덕은 갑자기 쌀을 바닥에 패대기치며 소리쳤다.
"야!내가 쌀박사로 통하거든!"
"근데 날 속이려고 들어?"
"수입쌀이랑 섞으면 누가 모를줄 알아?"
포대에 담은 쌀을 바닥에 다 쏟아 버렸다.
오랜 단골에게 속은 분을 삭이기 힘들었다.
지켜보던 희철은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장사가 안되어도 그렇지,,,"
"단골을 속여?"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어도 유분수지!"
상덕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속여 파는 쌀가게만 원망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배신당한 슬픔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장사가 되지않아 문을 닫는 곳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시장을 나올때마다 늘어나는게 닫힌 셔터문이다.
어제 반갑게 인사하며 커피 한 잔 마시던 사람이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하나같이 내일을 약속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상덕은 속이 상한 마음에 시장 한구석에 털썩 주저앉아 긴 한숨을 내뱉었다.
투덜거리며 쌀을 퍼담는 주인이 멀리서 보였다.
미안한 마음에 달려가 보려 했지만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마음만 답답할 뿐이었다.
오늘은 장을 보고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이게 세상 사는 현실이야!"
"이래도 네 방식만이 옳다고 생각하니?"
"오죽이나 힘들면 단골도 속여가면서 장사를 하겠니?"
"더러운 성질때문에 저 지경 만들었지만..."
"내 속도 터진다!"
상덕은 미안한 마음에 한참동안 괴로워했다.
억지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야채가게로 향했다.
손님을 맞이하는 얼굴이 영 반갑지 않은 모습이다.
상덕이 처음 방앗간을 시작할떄부터 거래하던 단골이었다.
직접 농사를 지어 팔기때문에 믿고 맡기는편이었다.
오늘따라 야채가 싱싱하지 않았다.
개시를 못하는 날이 많아 재고가 쌓인것이다.
상덕은 차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싸게 해줄테니 가져가!"
"농사 지은거 다 갈아 엎어버리고 그거 남았어!"
한숨을 깊게 쉬며 하순이 말했다.
고왔던 그녀의 얼굴엔 주름이 깊게 패어 있었다.
그녀의 고단한 삶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상덕은 그저 한숨만 쉬며 바라볼 뿐이다.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내일은 닫혀진 캄캄한 가게만이 그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울적한 마음으로 간신히 장을 본 상덕은 한참동안 운전대만 바라보았다.
한숨 가득한 그녀의 속삭임이 귓가를 괴롭혔다.
또 다시 시작될 긴 이별이 두려웠다.
그녀옆에서 토막잠을 자고 있는 어린 딸의 모습이 가슴을 아리게 했다.
그 때 그녀와 이별을 하는게 아니었다.
눈시울 적시며 그를 바라보는 눈빛을 외면하기 힘들었다.
영영 헤어질 수 없는 인연이기에 선택한 이 길마저 외면하고 있었다.
막장에서 사고로 남편을 잃은 그녀의 기구한 삶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이제 그녀는 어디로 갈것인가?
이대로 보낼것인가?
한참동안 눈을 감은채 고민에 빠졌다.
희철아!
“ 저 야채 다 차에 싣어라!”
희철은 무슨 말인지 어안이 벙벙했다.
“무슨 말이야?”
“형!”
“시키는대로 하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상덕은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맘대로 차에 다 싣으면 어떻게 해?”
“내 맘대로!”
“왜냐고?”
“저 여자가 바로 내 여자니까!”
상덕은 차에서 내려 그녀와 잠든 딸을 차에 태웠다.
“아무 말하지말고 내가 하라는대로 해!”
“이제 더 이상 널 이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어!”
상덕은 급하게 차를 몰고 시장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그저 당황스러울뿐이었다.
놀라 잠에서 깬 민아는 울음보를 터뜨렸다.
“도대체 뭐 하는거야?”
“왜 이러는데?”
“아무 말도 하지마!”
“더 이상 널 내버려 두라고 말하지마!”
“이젠 내 맘대로 할거니까!”
하순은 멍하니 창밖의 한강만 바라볼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