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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맞다


BY 익명 2000-05-06



길지도 않을 봄날에 비가 내려
잎새들은 긴장하였다.

비가 내려 비를 맞으며
걷고 있는 한 순간
생각마저 비에 젖어 투명해지는 때
서글픈 망각은 참으로 편리하였.

가로수 잎들은 밤이 오기 전에 떨어져
비에 젖으며 움직임을 멈춘다.

언젠가 이곳을 지난 적이 있었다

다시 올 미련의 땅인 줄 도 모르고 지나던 길에서
최초의 나와 최후의 내가 만난다.

그리고 그날처럼 비가 내린다.

지금은 한 여자가 그 길목에 산다.

비가 내리던 날 나는 그 여자와
그 여자의 정부와 밀회를 목격하였다.

비가 내려 사람들의 눈동자를 조금 적실 뿐
아무도 타인의 세계를 눈 여겨 보지 않았다.

골목 네거리 끝에는 24시간 편의점이
밤새 뜬 눈을 세워 지켜보았지만
누구도 그 정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타인의 얼굴은 아무도 몰라야 할 비밀이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시간을 사고 황망히 사라지곤 한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서 커피를 산다.

이를테면 그 여자를 기어이 사랑한다는 쪽지를
문 앞 한 켠에 놓아 두는 일.

나는 안다, 비가 내릴 때 마다
사람들은 모두가 처마 밑을 찾아 들지 않는다.

망각의 편리한 기교를 생각하며
그 여자와 밀회하였다.

가끔은 33년간 놓쳐버린 희망을 이야기 하지만
희망의 절망적 의미에 대해 모를 나이는 아니었다.

비가 내리는 길목에서
비를 맞으며 피빛 장미꽃을 사는 일
결국은 모두가 패망하는 미래를 위해
습한 공기마저 긴장된 경련을 일으킨다.

비는 나를 적실 뿐 제지하지는 못하고
그리고 당연하게 꽃을 던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