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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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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처럼 여울지다


BY 오틸리아 2022-08-05

- 눈오는데 일찍 퇴근 안해?

박선배의 전화를 받고 반사적으로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 보았다.  이제 막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거리에 간간이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7층에서 내려다 본 퇴근길 풍경은 마치 검은 볼링공이 구르듯 사람들의 동그란 두상이 네거리 횡단보도 위를 일정한 간격으로 사방으로 흩어졌다 모였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선배는 밑도 끝도 없이 '누군가 내가 만나보면 무지 반가워할 사람과 함께 있으니 서둘러 나오라'는 지시를 내뱉고는 전화를 끊었다. 첫눈도 아닌 두 번째 눈이 그닥 감흥도 없을 뿐더러 이틀째 따끔거리는 목감기가 만사 귀차니즘을 불러일으키는 중이라 운전대를 잡고도 한참을 머뭇거렸다. 빽빽한 주차장에 하나 둘 빈공간이 늘어날 즈음 한톤 높아진 박선배의 전화를 다시 받았다. 약간의 취기가 느껴지는 선배의 말투에는 안오면 다신 내 꼴 안본다는 으름장이 섞여있었다. 만나면 반가울 사람이 누구일지 사실 궁금하지도 않을만큼 두통과 인후통이 내 온 감각을 점령해가는 중이었다.

   TV에 한번도 안나온 맛집! 이라는 플래카드를 보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고깃집 현관에서부터 박선배의 칼칼한 음성이 들려왔다. 빼꼼히 열린 격자무늬 창너머로 선배의 진보라빛 입술이 바쁘게 여닫히는 것이 보였다. 오늘 그녀의 컨셉은 앵두알만한 진주에 큐빅이 촘촘히 둘러 박힌 목걸이 귀걸이 반지 팔찌 4종 세트였다. 유독 보석 치장을 좋아하는 선배의 취향중에서 진주는 그나마 화려한 축에도 못끼는 수수한 컨셉이다. 방문 앞에 서있는 나를 발견하고 번쩍 든 그녀의 팔목에서 무게를 견디지 못한 진주와 큐빅들이 주르르 팔꿈치쪽으로 흘러내렸다. 반갑게 활짝 웃는 선배의 진보라 입술에 인사를 하고 조심스레 문지방을 넘어서는데 선배와 마주 앉은 한 사내의 뒷모습이 보였다. 휘움한 등어리를 보아  꽤나 장신일 듯한 사내의 숱적은 머리통이 천천히 나를 향해 돌아왔다. 크리스탈잔 밑바닥처럼 두꺼운 안경알 너머로 반가움과 어색한 미소가 자아낸 눈주름들이 고개숙인 주인을 따라 아래로 축 늘어졌다. 고개를 바로 들지 못하고 겸연쩍게 웃는 사내의 희멀건한 얼굴에서 낯익은 덧니가 보였다. 십수년만에 보는 낯익은 손이 나에게 악수를 청하였다. 얼결에 맞잡은 손은 희고도 가늘었다. 아니 차라리 앙상하다고 할 만했다.

- 느그 둘 몇년만이냐? 한 십년 넘었지?

박선배는 발그스름한 얼굴로 우리 두사람의 어색한 해후를 즐기는 듯 해보였다.

- 오랜만이야, 잘 살고 있지?

기어들어갈 듯 어렵게 내뱉는 그의 인사말이 가볍게 떨렸다. 순간, 반가운 표정을 해야할지 덤덤한 표정을 지어야할지  난감해졌다. 박선배는 하필 이런 자리를 만들어서 나를 불렀을까 하는 원망을 하며 김치국물이 군데군데 튀어박힌 주황색 방석을 발끝으로 툭툭 밀며 선배의 옆자리에 앉았다.